서지정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0189


정치외교 전문 칼럼리스트인 로버트 카플란 책은 『지리의 복수』라는 책 이후 두 번째다. 국제정치 설명에 있어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명저로서, 국제정치나 지리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강추하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카플란 이름값을 따라 이 책까지 알게 되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굉장히 재수없는 책이다. 출판된 지 2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책인데도, 책에서 내놓은 경고나 예측들 절대다수가 맞아떨어졌고, 이 대부분은 사람 불편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안 그래도 카플란의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문체 때문에 그 특성이 더 심하게 다가온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로버트 카플란은 평화나 민주주의같은 이상적 가치도 좋으나 그 이전에 국제정치가 권력투쟁의 장임을 명심해야 하며, 국익증진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여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극렬 현실주의자다. 또한 카플란은 국가의 지리적인 특색이 정치, 경제, 사회문화 그리고 외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국가는 지리적 운명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보는 지리 결정론자이다. 딱 봐도 대중에게 인기있을 성향은 아니며, 이게 그의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더 심해졌다.  


저자가 책을 쓴 90년대엔[각주:1] 소련이 해체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체제대결에서 확실하게 승리했으며,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가 골고루 풍요로워지며 평화를 누릴 거라는 장밋빛 예측이 만연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토마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나 『세계는 평평하다』같은 유명한 책들은 그런 풍조 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카플란은 그런 장밋빛 예측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오히려 냉전 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이 책은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과 충돌』[각주:2] 같은 책과 일맥상통하는데, 불행히도 2019년 시점에서 볼 때 국제정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예측에 더 가깝게 움직였다.



책에서 펼쳐놓은 주요 분석이나 예측들을 살펴보자면.


1. 냉전 이후 개발도상국들은 점점 무질서의 영역으로 빠져들 것이다. 개발도상국은 인구 폭증,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무분별한 도시화로 인한 슬럼 문제, 부족주의와 문화적 충돌 등의 문제를 앓고 있으며, 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을 위협하는 걸 넘어 국가 자체를 붕괴시키거나 재정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격차는 더 커질 것이며, 이런 분열은 선진국조차 위협할 수 있다.


2. 민주주의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세계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중산층 수준의 생활 수준에 도달했거나, 정치적으로 국민들이 통합되었으며 중앙관료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동네에서나 기대해볼 만하다. 그렇지 않은 지역에 함부로 민주주의를 강요했다가는 민주주의가 부족주의적 욕망에 악용되거나 국가를 껍데기만 남은 무질서체제로 만들 수 있다. 그런 민주주의보단 차라리 중국이나 싱가폴처럼 '적절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독재체제가 더 낫다. 


3. 홀로코스트나 제노사이드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막기 위해선 전범재판을 벌이거나 타국가에 군대를 파병하기보다는 권력 집단 간 세력 균형[각주:3]을 이루는 게 더 좋다. 그것이 더 확실하며 국민 여론의 눈치를 덜 볼 수 있는 방법[각주:4]이다.


4. 선진국 엘리트들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개발도상국에 파견나간 엘리트조차 자기 거주지 바깥의 삶은 직접 접하기 힘들며, 선진국스러운 사상과 이념이 강하게 뿌리박혀 실제 현장에서 목격한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선진국 엘리트들은 개발도상국을 분석하면서도 자기들이 이해가능하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본다. 따라서 이들은 왜 개발도상국에서 민주주의 붕괴, 내전, 학살 등의 문제가 반복되며. 국민들이 왜 천박한 마음가짐을 가졌으며 일상보다는 차라리 전쟁터에서의 영웅스러운 삶을 원하는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5. 다문화주의를 통해 이질적인 국민들이 유입되고, 세계화로 엘리트들이 애국심이 줄어들며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이 서민들과 분리되고,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매스컴이 대중의 문화를 경박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현상은 선진국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 특히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이런 현상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며, 연예인같은 지도자를 양산하여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6.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해롭다. 무조건 평화만 추구하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포기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인류는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의 적을 인식함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고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만들 수도 있다. 


7. UN은 국가들 간의 합의체이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하려면 국가들 전체 즉 세계 전체가 똑같은 가치관과 사고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한 데다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이것이 UN이 유명무실한 기관이 된 이유이다. 



보다시피 이 주장들은 전부 맞는 것으로 결정난 듯 하다. 1은 시리아, 이라크, 예멘, 아프간, 나이지리아, 리비아 등의 내전을 통해 분명해졌고, 2.는 아랍의 봄이 튀니지 빼고 죄다 실패로 끝난 데서 확인할 수 있고, 3.은 각종 전쟁 범죄에 국제기관이 무력한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으며, 4.는 르완다를 GGI 지표를 핑계로 '미국보다 성평등한 사회'라는 식의 뻘한 분석이나 내놓는 세계 메이저 언론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5.는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이고, 6.은 한국 진보좌파를 보면 어느정도 동의가 되며, 7.은 논리를 보면 자동으로 끄덕거려진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전부 사실로 드러난 내용이기에 반박도 할 수가 없으니, 보는 독자들은 힘이 빠질 뿐이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읽으면 알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저자가 좀 '꼰대 틀딱' 성향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으며 현대 사회에 찾기 힘든 희대의 명저라 한 걸 보면 말끝마다 삼국지를 강조하는 한국의 중장년 남성들이 연상된다. 그리고 대중매체로 인해 현대사회가 타락했다는 투의 내용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도 많이 나와 너덜너덜해진 주장인데다, '게임이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식의 논리가 자꾸 연상이 된다. 


극단적이어서 동의하기 힘든 주장도 있었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에겐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나으며, 독재국가가 의외로 민주국가보다 부패가 적다는 식의 주장이 있었는데, 그건 독재자가 리콴유, 박정희, 피노체트, 장제스처럼 민주주의를 억압하더라도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개념인일 때나 성립하는 주장이다.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마오쩌둥, 뒤발리에 부자, 차베스와 마두로, 사담 후세인, 이디 아민 같은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었나? 


또 저자가 국제정세에 대한 비관론을 설파한 건 1990년대의 발칸반도나 서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여러 내전을 보고서인데, 이들 국가에서의 분쟁은 현재 대부분 해결되었으며, 나름의 노력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아주 비관적인 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내전들도 잘만 하면 예전에 벌어졌던 분쟁처럼 잘 봉합될 수 있다. 



그래도 저자가 남긴 메세지는 현재 시점에서 의미심장한 것들이 많으며,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정체성 정치가 유행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점에선 더더욱 그렇다. 20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고, 20년 뒤에도 의미심장하게 읽을 글을 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카플란은 그걸 해낸 정말 통찰력 있는 칼럼리스트이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10점 만점에 9점은 줄 좋은 책이다.  

  1. 출판은 원서 기준 2000년에 이뤄졌으나, 이 책은 그가 90년대에 쓴 칼럼과 논문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본문으로]
  2. 냉전 시기엔 자본주의vs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냉전이 지난 시대엔 서로 다른 문화나 가치관을 가진 '문명'들로 세계가 나뉘어 분쟁을 벌일 것이라는 게 요지이다. [본문으로]
  3. (신)현실주의에서 단골메뉴처럼 내놓는 평화 유지 방법. [본문으로]
  4. 처음에는 국민이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파병을 원할 지 몰라도, 자국민 전사자가 발생하면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된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