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 「창비어린이」, 2019년 봄호, p.27-36.

아쉽게도 인터넷에선 볼 수 없으니 직접 사거나 도서관에서 읽는 방법밖엔 없다. 


나도 트위터에서 알게 된 글인데, 진짜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욕 한 게 아니다. 진짜로 문장 하나하나가 명문이다. 보면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이 사회는 OO 혐오가 심각하며 규제되어야 한다"는 신좌파식 진부한 레토릭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각주:1] 그는 흔한 먹물좌파식 이론으로 글을 쓰기 보다는 자신의 특수한 처지가 바탕이 된 아동과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아동혐오 현상을 '이미지 시대'라는 특이한, 신좌파들 이론보단 훨씬 맞아떨어지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흔해빠진 선악구도가 없는 건 덤이다. 

신좌파식 레토릭에 학을 뗀 나에게 단비같은 반가운 글이다. 신좌파에 반대한다면서 지금까지 이런 발상을 못했을까...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으니.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흥미로웠던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1. 장애인의 입장에서 본 아동[각주:2]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아동기였다. 내가 어린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주로 만나 교류해야 할 동료들이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피부색, 신체, 정신 구조를 가진 존재와 함께 있을 때, 어린이는 결코 아무 획책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어린이는 또래들 사이에서 놀림과 배척의 대상이다. 장애 아동은 또래가 아니라 성인과 있을 때 훨씬 행복하다.

 아동은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동료 시민이다. 길에서 만난 어린이들은 부모 손에 이끌려 곁을 지나쳐도 시야에서 내 휠체어가 사라질 때까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몸을 비튼다. 먼 거리에서도 놓치지 않는다. "와, 장애인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다른 신체를 가진 존재를 처음 마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이해하지만, 적응하기 쉽지 않다. 멀리서 아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급적 마주치기를 피해 길을 돌아간다.

 그런데 사실 어린이가 나를 보고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데에는, 내가 어린이에게서 몸을 피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가 놓여 있다. 그 아이들이 태어난 동네나 다니는 학교에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인권 교육이나 영상을 통해 장애인의 이미지를 만나기 때문이다. 아예 이미지를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면, 아이는 나를 '장애인'이라고 특정하게 지칭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장애인과 어린이가 욕망을 가지고 부딪치고, 소란을 피우고, 진로에 방해가 되더라도 몸과 몸으로 더 자주 만나는 순간들을 상상하며 이 글을 쓰기로 한다. 소비자인 어른에게 '육성되는' 아동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른과 함께 자라는 아동을 떠올린다. 나를 보고는 "와, 장애인이다!"고 외치면서 부모에게 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에 대해 자신의 궁금증을 자기 입으로 질문하는 아이를 상상한다.

같은 책, p.27-29.

  흔히 아동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혐오에 대한 반동으로 "아동보단 개저씨가 더 위험하지 않냐?"는 식으로 아동의 잠재적인 부정적 요인들을 무조건 실드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동들이 장애인에게 보이는 철없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동은 순수무결한 선한 피해자가 아니라, 소수자이면서도 동시에 성장기에 있는 존재로서 서투르고 답답한 존재다. 나는 그의 시선에 동의하며, 소수자에도 어둡고 음침한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소수자의 진정한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아동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존재로 존중하려 시도한다. 아동들이 저러는 게 장애인을 교육이나 영상 같은 이미지로만 접했기 때문이라면서 이해하려 시도한다. 난 이 구절에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며 믿음직스럽다고 느꼈다. 장애인으로서 아동들 때문에 힘든 일 많았을 텐데, 저런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건 어지간한 인품으론 못 할 짓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각주:3]을 핑계로 한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귀감이 되기 좋은 인물이다. 

 

2. 이미지만 남은 소수자들

 아이를 양육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가치를 띠며 국가와 시장도 (최소한 규범적, 형식적으로는) 양육을 지원하고 배려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국가는 공적인 주체로서 아동을 보호하고 돌보며, 사회 구성원들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학대 및 성범죄 등이 알려질 때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동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동 혐오라는 현상을 아동에 대한 물리적 학대로만 이해한다면, 현대 사회의 특징인 아동 배제 기제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아동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하고 그에 열광하면서도, 그 속성을 벗어난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떨까? 국가 단위에서 그 속성이란 사회, 경제적 재생산의 상징, 미래의 인적 자원이자 소비자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 일반에게는, 바로 '귀여움'이다. 아동의 귀여움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에 머물지 않고 전국 단위의 '공적인 것'으로 소비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정반대로 '귀엽지 않은 아동'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동은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울고, 소란을 일으키고, 먹고, 싸고, 부수는 생명이다. 

(중략)

 '프린세스 메이커'나 유튜브, TV에서 하루하루 귀여움을 더해 가며 성장하는 아이를 지켜볼 때와는 달리, 정말로 한 생명을 돌보고, 같이 살아가며, 성장에 함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모든 동물은 생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 부모에 의해서도 쉽게 통제되지 않고,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시끄럽게 소음을 내며 운다. 아동은 (이미지로 등장할 때와 달리) 아무런 위협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바이러스와 세균을 지닌 인간이고, 먹고 배설하고, 피와 땀을 가진 '축축한' 존재다.

 현대 사회의 공적 공간은 점차 이러한 '축축한' 존재들을 추방시키고 있다. 장애인과 빈자, 특정 인종의 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공적 공간에서 손쉽게 추방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아동이 그 차례를 맞았다. 아동들은 더 이상 어른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은 어떤가? 노인들은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 기초 규범을 지키지 않는 존재로 지목되면서 젊은이들에게 혐오받는 대상이 되었다. 공적 공간은 점점 젊고, 건강하고, 세련된 행위 규범을 익한 존재들만의 세계가 되어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로서의' 소수자들이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비교적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다. 아동 유튜버들의 인기와 노키즈존의 병존은, 이처럼 이미지는 있되 물적 존재로의 몸은 마주치기 어려운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책, p.31-34.

보면서 감탄만 나오는 명문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단은 보면서 머리를 두들겨맞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현대 사회의 분노와 혐오, 정치적 올바름 등등 소수자 이슈 전반을 잘 요약해준 명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현실을 적확하게 설명한 글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요즘 사회풍조가 너무 윤리적 결벽증에 빠진 건 아닌가 싶었던 나로선, 윤리적 결벽증이 이런 현상을 낳지 않았나 가설을 세워본다. 이건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글을 따로 써야겠다. 



+ 이 저자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고, 소수자의 존엄성을 담담하게 옹호하는 책도 썼다. 칼럼 보고 믿음이 생겨서 사 봤다. 서평도 곧 올려야겠다. 

  1. 특집으로 같이 기고된 나머지 글들은 죄다 그런 레토릭이었다. [본문으로]
  2. 저자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을 받은 장애인이다. [본문으로]
  3. 냄새 난다, 잠재적 범죄자다, 이기적이다 등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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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재의 미흡한 친환경 기술을 서둘러 보급하면 어떤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프로그램은 2050년까지 독일을 탄소 기반 연료에서 완전히 졸업시키도록 설계된 정책이고,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독일은 발전 용량이 40기가와트에 달하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이론적으로는 통상적인 전기 수요를 거의 모두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용량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지리적으로 높은 위도에 위치해 있고, 구름이 걷히는 때가 거의 없으며, 해가 나는 때가 거의 없다. 이 많은 태양광 패널이 생산하는 전기는 독일 총수요의 6퍼센트에 불과하다. 독일은 원자력 발전 시설을 대중이 우려한다는 이유로 폐쇄하고 있고, 지정학적 이유로 천연가스 연소 발전소를 줄이고 있다. 그러면 풍력 발전(장소 선정에 대한 우려 때문에 더 이상 개발할 지역이 동났다), 그리고 석탄 연소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

태양광 발전은 독일에서는 대체로 불가능하므로 석탄과 갈탄(축축하고 질이 낮으며 독일에서 생산되는 석탄으로서 그 어떤 연료보다 높은 탄소 족적을 남긴다)이 현재 독일 전기 총수요의 42퍼센트를 생산하고 있다. 석탄/갈탄 연료 발전소를 가동하거나/가동 중지하려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 발전소들은 어쩌다 독일 전역에 깔린 태양광 패널이 가동되는 날에도 계속 연료를 태워야 한다. 그 결과 독일은 태양광 발전으로 탄소 배출량을 거의 줄이지 못했다. 2007-2009년 경기 침체가 없었다면, 에네르기벤데 프로그램 때문에 오히려 탄소배출량은 증가했을 것이다. 

- 피터 자이한,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홍지수 역, 김앤김북스, 2019, p.511 

독일 탈원전의 폐해는 한국 탈원전 정책 논의과정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것 같은데, 에너지정책 전반이 이 정도로 문제있을 줄은 몰랐네. 디젤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이었나.

확실히 한국에선 독일이 친환경국가라는 선입견이 강하구나. 나도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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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안그래도 출산율 추락으로 우울한데 진짜 짜증나게 만드네.


https://www.ppomppu.co.kr/zboard/zboard.php?id=freeboard&no=6182160&extref=1


나탈리아 카넴 유엔인구기금(UNFPA) 사무총재는

 

한국의 급격히 낮아지는 출산율에 대해

 

"최악의 상황을 넘어서고 일반적인 통계학을

 

따질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라고 우려를 표했다.


출처도 없어서 위 구절을 정말로 한 게 맞나 검색해봤더니 출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해서 나오는 건 죄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펌글이고, 그나마 있는 뉴스사이트 하나는 공신력 없는 듣보사이트라 인터넷 반응 베껴 올린 걸수도 있고... 

실제로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가짜뉴스이다. 문단 띄어쓰기부터 뭔가 이상하게 돼 있고..  


여담이지만 나탈리아 카넴은 한국의 인구구조가 유례 없이 급격하게 변했다고 할 뿐, 그 이상의 표현은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한국의 급격한 발전을 칭찬한 적도 있었다. 



https://www.fmkorea.com/1452997397

확실하진 않지만 위도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주작같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학술적인 문서를 찾아볼 급의 사람들이 정확한 출처를 안 밝힌다는 게 이상하다.  



https://www.fmkorea.com/1499262009

위 글은 아예 동명의 사이트에서 주작이라 결정났고,

https://www.fmkorea.com/1499574087 





진짜 출생아 수나 출산율이 어찌될지 궁금하면 차라리 오늘 발표된 통계청의 인구추계를 봐라.




물론 한국 출산율이 재앙 수준인 건 부정 못하고, 저런 말이나 예측이 실제로 있었어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저런 소리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와 누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다는 건 천지 차이이다. 

이런 게 바로 가짜 뉴스다. 


인용문이나 캡처짤이 출처 없이 돌아다닌다면 가짜뉴스일 확률이 높다.

원문을 검색해서 찾을 때까진 일단 판단을 유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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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주요 강국들은 미국, 유럽 선진국들(혹은 EU)[각주:1], 러시아, 일본, 중국,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터키 정도다. 한국도 포함될 지 모르지만 일단은 빼보자. 

이들 국가는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 일단 정치-경제-문화-가치관의 측면에서 바라보자. [] 안은 주로 영향력을 끼치는 분야이다. 


미국: [정치/경제/문화/가치관 모두] 세계 최강대국이며 최고 수준의 선진국으로서 시장경제를 세계에 퍼트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전달한다는 사명을 띰. 그러나 독단적이고 오만한 태도와 실책으로 수많은 반미국가들을 양산해 옴. 

EU: [정치/경제/문화/가치관 모두] 미국과 비슷하나 총체적인 영향력은 미국보다 적으며 반감정도 덜함. 그러나 일단 관계를 맺으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미국보다 더 강조함. 

러시아: [정치/문화] 역사와 사회적 유산을 바탕으로 구 소련권에 영향력을 행사함. 중국보다는 나으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지 않음. 타국 부분 합병, 간첩질, 대리전 참전, 사이버 정보전 등 비재래적인 국제정치 수단을 많이 사용함. 

중국: [정치/경제] 미국 다음의 최강대국으로 경제/군사적인 영향력이 주이다.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유라시아에 영향력을 뻗치려 함. 미국/EU와 달리 악명높은 독재국가라도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중국은 서구와 다르다면서 대놓고 거부하려 들어 서구와 마찰을 빚음. 문화 콘텐츠나 가치관의 측면에선 국력에 비해 매우 빈약하며, 과도한 민족주의적이고 공격적인 외교로 주변국의 반발을 많이 사고 있음. 

일본: [경제/문화] 경제력, 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뻗치고 있음.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나 미국과 EU처럼 앞서서 요구하지도 않음. 그러나 군대가 없고 미일동맹의 영향력이 커서인지 정치/군사적인 영향력은 국력에 비해 초라한 편. 과거사로 인해 타 아시아 국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더더욱. 

인도: [정치/문화] 파키스탄과 정치/군사적으로 대립함. 서구와 많이 이질적인 힌두(+이슬람) 문화를 가졌으나, 형식적으로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중국/러시아처럼 서구와 충돌하지 않음. 발리우드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흥하나, 힌두교도는 남아시아 밖에 거의 없기 때문에 힌두교 소프트파워는 확장성이 떨어짐. 

사우디 아라비아: [정치/경제 일부/가치관] 세계 (수니) 이슬람의 종주국. 석유로 유명한 국가이다. 친서구 스탠스라곤 하지만 억압적인 왕정 독재국가이며, 원리주의적이며 구태스러운 와하비즘의 국가이다. 이런 와하비즘을 전 세계의 모스크나 재단을 통해 퍼트리고 있으며, 시아 종주국 이란과 대결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테러리즘을 지원하며 여러 내전에 개입한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이란: [정치/경제 일부/가치관] 세계 시아 이슬람의 종주국. 천연가스, 석유 등 천연자원이 많이 난다. 사우디보다야는 낫지만 종교적 폭정이나 독재정치가 무시못할 급이고, 시아파 종교 원리주의를 확산하며 사우디와 대결한다고 여러 내전에 개입하고 있다.  

터키: [정치] 오스만 제국의 후예로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주변국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케말리즘이라는 근대 이슬람의 희망인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에르도안 집권 이후 후퇴하는 추세.


정리하자면 이 정도다. 보다시피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분야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그 양상도 다르다.

하지만 지금 주목하고 싶은 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다. 


이런 말하면 욕먹을 지 모르겠지만 저 국가들 중 제일 긍정적인 영향력을 투사하는 국가들은 양적으로는 미국, 질적으로는 EU다. 이들 국가들은 많은 과오를 저질렀지만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정치경제적 선진국 진입에 성공하고,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에 익숙해진 한국인에겐 그렇게 보일 것이다. 

반대로 제일 부정적인 영향력을 투사하는 국가들은 양적으로는 중국, 질적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다. 일방적인 외교로 쓸데없는 반감을 사는 나라와, 종교 원리주의와 테러리즘 그리고 전쟁범죄를 조장하는 나라를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다. 


한국은 어디쯤에 위치했을까? 

한강의 기적이나 전자제품이나 K-pop 같은 걸 생각하면 긍정적인 쪽에 가깝겠지만, 최근 불거진 K-pop의 어두운 면이나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한다는 K-Beauty,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벌이는 문제들을 생각하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한국도 이제 세계적인 수준의 강국이 되었다. 한국의 위상과 평판을 지키고 향상시키려면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듯. 

  1. 노르웨이나 스위스처럼 EU 가입국이 아닌 유럽 선진국도 있으나, 절대다수는 상위 국제기관 EU의 결정 및 규약에 큰 영향을 받기에 편의상 EU로 통칭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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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에 책임이 덜한 개발도상국이 제일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 최근에 서평을 쓴 『팩트풀니스』에선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곤 했는데, 편의상 관례대로 선진국-개발도상국 분류를 쓰겠다. 편하게 이 글에 나오는 1-3단계를 개발도상국, 4단계를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자. )

 

나는 기후 변화로 인류 문명이 붕괴된다는 극단적인 예측엔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부족하게나마 있는 데다, 과학기술이 발달해 그 피해를 상쇄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선진국들은 그렇다.

물론 변덕스럽고 극단적인 날씨가 일상화되고, 식품값 폭등이 잦아지는 정도의 불편함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라고 하면 못 할 건 없는 수준이라고 본다. 온실효과를 차단하는 노력과 동시에,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야지 별 수 있겠나.   

 

하지만 개발도상국들은 다르다. 그들은 기후가 변화하면 기아나 내전으로 국가 기반이 붕괴되는 대재앙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몇몇 분쟁국가나 최빈국에선 문자 그대로 문명이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 현재 시리아 내전도 기후변화로 가뭄이 만성화되면서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에 사람이 몰리게 되어 생긴 삶의 질 저하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harmless.egloos.com/3499833 참조.) 아직 평균기온이 1도밖에 안 올랐는데 벌써 내전으로 붕괴된 나라가 발생했다. 더 올라가면 얼마나 많은 국가가 분쟁에 휘말릴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예상하는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 선진국들은 싱가포르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냉대-온대기후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좋은 기후조건을 가졌다. 어지간히 기후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못 사는 지역이 될 일은 없다. 

반면 개발도상국들은 건조기후나 열대기후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지역에선 조금의 기후 변화도 거주지를 사람 못 사는 지역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 개발도상국들은 생활수준이 낮고 축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다. 

 

- 개발도상국들은 부족/인종 갈등, 종교 간 충돌, 빈부격차, 국민의식의 부재 등으로 잠재적 갈등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높으며, 이를 피 흘리지 않고 해결할 사회적 합의/시스템은 더더욱 부족하다. 그렇기에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큰 사회적 격변이 벌어질 수 있다.

 

-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못 사는 나라 한정이지만, 출산율이 높아 인구가 폭증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의식주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기후변화로 식량/수자원이 부족해지기라도 한다면 문자 그대로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 

 

개발도상국들은 화석연료를 낭비할 여력이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최근에야 낭비하기 시작했기에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없거나 적다는 사실이 결부되면 위 비극은 더 심각해진다. 

 

 

제발 내 우려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화석연료 낭비하는 선진국이야 기후변화로 대재앙을 맞아도 '이기심의 대가를 치른다'는 도덕적 합리화라도 가능하지, 화석연료라는 문명의 이기도 누리지 못하다 선진국과 같은 지구에 산다는 이유로 대재앙을 맞는 개발도상국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선진국들을 저주한다면 우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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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도가 머물던" 부분의 살짝 고조된 멜로디만 기억했던 곡인데, 이게 아이유 곡이었구나. 



잔잔하고 상념에 빠지기 좋은 구슬픈 멜로디,

구슬픈 감정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보이스,

황진이의 시조를 현대적으로 개작한 느낌이 나는 은은한 가사. 

(의도한 건지 몰라도, 뮤직비디오 배경이 전통 한옥이다.)  


내 마음을 완전히 들었다 놓다 한다.



개인적으로 노래 가사에 공감을 잘 못해서 가요를 잘 듣지 않는데, 이 곡만큼은 예외다. 

내가 가요에 빠진 건 거의 10년 만인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공교롭게도 그때도 아이유 곡에 빠졌었지. 정확히 뭔지 기억도 안 나지만.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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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쓴 『팩트풀리스』 리뷰


위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A나 B 중 하나로만 보는 간극 본능을 가졌기 때문에, 세계를 자꾸 선진국 vs 개발도상국의 구조로만 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지구촌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내부에서도 생활수준의 격차가 크고, 같은 개발도상국이라도 과거와 현재의 보건, 생활수준 격차는 크게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1인당 소득수준(2011년 달러 기준)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세계를 4단계로 나눈다.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하루 2달러 미만             하루 2~8달러              하루 8~32달러          하루 32달러 이상


       약 10억 명[각주:1]                약 30억 명[각주:2]                  약 20억 명[각주:3]           약 10억 명[각주:4]


       절대빈곤층 레벨.      절대빈곤을 막 벗어난 레벨.        중산층[각주:5] 레벨.          선진국 레벨. 




참고로 국가별 등급 현황은 다음과 같다.[각주:6]





한국은 역시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4단계에 위치해 있다. 

중국은 3단계, 인도는 2단계, 북한은 아시아 꼴찌로서 1단계(....).


다만 4단계에 터키나 러시아가 있는 걸 보니 느슨한 선진국 기준인 듯?

 

보면 알겠지만 인구규모 어느정도 되면서 선진국인 나라 자체가 드물다.

30-50 클럽이란 말이 낯간지스럽긴 하지만 자랑스러워할 성과이긴 한 듯. 




그렇다면 한국은 언제부터 4단계에 있었을까? 


https://www.gapminder.org/tools/#$chart-type=bubbles에서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경제발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1971년까지는 1단계, 

1972년 - 1986년까지는 2단계, 

1987 - 2003년까지는 3단계

2004년부터는 4단계다.


즉 이 지표로 한국은 2004년부터 선진국인 셈. 




신기하게도 위 시대별 분류가 한국의 사회상과 꽤 맞아 떨어진다.


일단 한국이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선 1972년




계속 올라가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정점에 도달하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음식의 질은 몰라도, 양적으로 배고플 무렵은 그 무렵 끝났다는 뜻.



그리고 2단계에서 3단계로 올라갈 1987년엔 



다들 알다시피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물론 간선제 상황에서 전두환 임기가 끝나가는 데 맞춰 벌어진 운동이니 우연이긴 하다.  

하지만 우연이라고만 보기엔 많이 신기하다. 

위 각주에서 말했듯 민주화 필요조건이 3단계 이상 생활수준에 해당하는 중산층 형성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고 3단계에서 4단계로 올라간 2004년, 정확히 2004년은 아니었지만 이 무렵이었다.


스타벅스가 유행하면서 '왜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냐'는 식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커피나 몇품 등으로 사치부리는 여자를 일컫는 '된장녀'라는 멸칭이 유행어가 되었다.

생활수준이 선진국에 도달하면서 소비 문화가 발달했는데, 국민 의식은 소비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생긴 촌극이다.


현재는 위와 같은 비아냥이나 조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식의 소비패턴에 익숙해졌고, 소비문화가 더 발달하면서 비싼 커피와 대비되는 싼 커피도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득수준으로 세계를 네 단계로 나누는 건 재미있으면서도 설명력이 높은 좋은 지표인 것 같다.

이런 지표에 근거한 사회분석이 많이 나왔으면.

  1. 정확히는 8억명. [본문으로]
  2. 정확히는 37억 명. 반올림하면 40억 명이 되야 하지만, 그러면 10억명 단위로 반올림했을 때 네 단계 합이 80억이 나온다. 사실 현재 인구가 70억을 넘어 80억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세계 인구가 70억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혔다보니 이렇게 냅둔 듯. [본문으로]
  3. 정확히 20억 명. 10억 명 단위로 할 때와 같다 [본문으로]
  4. 정확히는 8억 명. [본문으로]
  5. 선진국 내부에서의 중산층을 생각하면 안 된다. 1단계부터 4단계를 망라하는 지구촌 전체에서의 중산층을 의미한다. 흔히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으로 말하는 '중산층 형성'에서의 중산층은 이런 의미다. [본문으로]
  6. 원랜 저작권 문제로 저자가 따로 만든 사이트https://www.gapminder.org/에서 퍼오려 했으나, 전세계를 한눈에 보기엔 부적합해서 그냥 책을 촬영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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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4564546



예전에 대만 여행가서 서점에서 보고 번역만을 기다린 책이었는데, 드디어 출판되었구나. 예전에 TED 영상 보고 알게 된 사람이라 특히 기대가 됐었다. 출간되자마자 바로 사서 3일만에 다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의학자 겸 통계학자이다. 그는 의사와 통계학자로 활동하면서 본 수많은 데이터와 경험을 통해, 세상이 진짜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 우리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사실 충만함을 나타내는 제목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 볼 수 있듯, 그는 거짓 정보나 오해를 데이터와 경험을 통해 사실로 가득 채운다. 더 나아가, 왜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지 제언했다.


시작하기 전에 한 문제를 풀어보자.


문제)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A) 거의 2배로 늘었다.
B) 거의 같다.
C)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정답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보고 각주버튼을 눌러 정답을 확인해 보자.[각주:1]

혹시 틀렸는가? 틀렸다고 좌절하지 마라. 
이거 맞춘 사람은 조사 대상자의 7%에 불과하니까.


그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세계의 평균수명, 출산율, 인구예측, 교육수준같은 삶의 양상과 관련된 통계지표를 A,B,C 3지선다형으로 내놓고 맞추게 하면, 사람들은 많이 틀리는 걸 넘어 정답률이 1/3 미만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A, B, C 중 무작위로 찍어맞추는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을 보인 셈이다. 무식한 일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문직, 정치인, 학자들에게 물어봐도 일반인과 하등 다르지 않은 형편없는 정답률을 보인다. 

그럼 왜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오해하는 걸까? 그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고, 저자는 다음과 같은 10가지를 제시한다.  

1) 간극 본능 -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편향
2) 부정 본능 - 세상이 무조건 갈수록 나빠진다고 보는 편향
3) 직선 본능 - 앞으로의 추세가 지금처럼 쭉 갈거라 보는 편향 
4) 공포 본능 - 언론에 노출된 비관적인/극단적인/공포스러운 일에만 신경쓰는 편향
5) 크기 본능 - 숫자/사건 하나하나에 일회일비하는 편향
6) 일반화 본능 - 몇몇 사례를 들어 집단 전체를 일반화하거나, 특정 집단의 성향을 보편의 성향처럼 일반화하는 편향
7) 운명 본능 - 특정 사회, 국가, 문화권은 영원히 현 상태로 남아있을 거라 간주하는 편향
8) 단일 관점 본능 -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든 것을 평가하려는 편향
9) 비난 본능 - 모든 잘못된 일을 특정인/특정 집단 탓으로 돌리려는 편향
10) 다급함 본능 - 지금 아니면 영원히 늦는다면서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편향


그런데 위 10가지 본능은 사실 하나의 본능으로 수렴한다. 
10가지 본능은 그 본능의 원인이나 구체적인 예시에 불과하다고 봐도 무관하다. 
저자는 대놓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400여페이지 되는 책 전체를 이 관점 비판에 할애하고 있다. 

바로 2)본능, 즉 세상이 갈수록 나빠진다고 보는 편향이다. 

이 편향과는 달리, 저자는 세상은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확실히 좋아졌음을 책 전체에 걸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설명한다. 당장 이 책의 부제부터가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다. 
1인당 gdp(ppp), 평균 기대수명, 아동 사망률, 교육 수준(여성들을 포함해서!), 전쟁 사망자 비율 등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눈부시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위 10가지 본능, 특히 2번 부정 본능은 그러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고, 세상이 갈수록 나빠진다고 잘못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을 선진국 vs 개도국의 구도로 보니 개도국들도 많이 발전해왔다는 걸 무시하게 되며, 
인구폭발같은 위험한 추세가 앞으로 계속 갈거라 생각하니 미래가 암울해 보이며,
매일같이 극단적인 범죄나 테러, 자연재해, 안전사고를 접하게 되니 세상이 끔찍해지는 것처럼 보이며,
큰 숫자나 극단적인 사건 하나하나에 일회일비하니 세상이 지옥처럼 보이며[각주:2]
개도국을 빈곤, 테러, 부패, 전쟁 같은 이미지로만 보니 개도국들의 빠른 발전을 보지 못하며[각주:3]
개도국은 운명적으로 빈곤하며 전통적인 구습이 지속될 거라 보니 희망 없는 지옥으로 보며,
한 가지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니 세상의 진보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며[각주:4],  
세상이 망가진다는 분노는 특정 인종이나 종교, 정치인, 금융인과 기업인을 적으로 돌리면서 더 심해지며,
비관론에 기초한 조급증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자기실현적으로 세상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위 생각들은 전부 잘못되었으며, 문제가 있을지라도 세상은 확실히 여러 면에서 좋아졌으니까. 

워낙 글빨도 좋고 근거가 워낙 탄탄해서 어지간해서 딴지걸긴 정말 어려울 것이다.




다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바로 저자가 7)의 운명 본능을 비판하면서 개도국도 빈곤에서 탈출하고 문화적 구습에서 멀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근거가 좀 부실하게 제시됐다. 저자가 물질적인 삶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 탓에, 생활수준으로 환원하기 애매한 문화적 현상에 대한 설명은 좀 소홀했다. 예를 들자면, 저자는 애를 많이 낳는다고 알려진 이슬람권 같은 지역에서도 저출산이 확산된다는 걸 문화 개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는데, 출산율은 문화도 문화지만 물질적 생활수준과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동한다. 이것만 봐선 생활 수준의 향상 때문인지 정말 충분히 문화가 바뀌어서인지 파악하기 애매하다. 여성의 권리가 올라가서 출산율이 낮아진 면도 있겠지만, 그 영향이 컸다면 이슬람권에서 히잡 의상이 유행/강제화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되는 것과 같은 문화적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더 심해진 사례들을 설명할 수 없다.


설령 이런 개도국의 긍정적인 변화가 실재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의 진보는 서구의 민주주의/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의 확산과 세계 2차대전 이후의 어마어마한 경제성장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인류학적 실존의 위기까지 거론되며,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서구식 보편적인 가치의 확산이 서구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인도 등의 성장으로 인해 점점 애매해지며, 세계화와 포퓰리스트적 사고로 인해 정체성 정치가 유행하고 문화적 충돌이 빈번해지는 지구촌에서도 빈곤 탈출과 문화 개선이 계속될지는 많이 의문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낙관적이지만도 않다.   



위에 저자의 순진해 보이는 시각을 비판하긴 했지만, 저자가 무책임한 낙관론자인 건 절대 아니다. 수는 많이 줄었으나 지구촌엔 여전히 기본적인 생활도 못 누리는 빈곤층들로 가득하고, 현재 지구촌은 기후 변화와 전쟁, 금융위기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지구촌의 과거와 현재를 사실에 기반하여 제대로 이해해야만 가능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위의 10가지 본능에 의한 그릇된 문제 인식은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자칫 문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위의 구절을 통해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좌우파 포퓰리스트들의 무책임한 언행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무조건적인 분노 조장, 필요 이상의 비관론, 특정인/특정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행동,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인 시야 등등...  포퓰리즘의 시대에 정말 절실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인간들이 세상을 잘못 인식하게 된 것도 단순히 언론이나 정치인처럼 특정 부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분명 잘못된 현실인식을 퍼트리곤 있지만, 이들의 일은 업무의 성격 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위의 10가지 본능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전해온 본능임을 인정한다. 그저 본능을 통한 인식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으니 고치자고 할 뿐이다.  



블로그 역사 처음으로 이 책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다. 책의 주제나 내용도 정말 좋으나 그 전에 저자의 담담하고 책임있는 태도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아니다 싶은 부분도 있었고 위에 길게 지적했지만, 이런 태도를 느끼자마자 저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데이터를 본 저자 입장에서 대중이나 엘리트의 오해가 참 답답할 법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걸 특정인/특정 집단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반은 어쩔 수 없다며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문제가 OO 때문이라고 보는 무책임한 사기꾼이나 포퓰리스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말 보기 힘든 부류의 사람이다.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이 시대의 대인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맺음말과 작가 소개를 보니 몇 년 전에 별세했다고 한다.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세상의 어두움과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전 세계에 불어닥치는 불안감과 포퓰리즘의 위험에 맞설 유일한 힘이 되리라.

  1. 정답은 C다. [본문으로]
  2.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남편/남자친구에게 죽임당하는 여자가 1년에 100명이나 된다"는 식의 레토릭이 여기 포함된다. [본문으로]
  3. 개인적으로 작년의 예멘 난민 수용 논란에서 이걸 크게 느꼈다. 유명한 수용 반대 근거 중에 "핸드폰 가진 부유해 보이는 사람이 진짜 난민 맞느냐?"는 식의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개발도상국, 심지어 예멘처럼 최빈국 수준의 국가에서도 휴대폰 사용률이 수십%에 이른다는 현실을 무시한 발언이다. 예멘이 고질적으로 불안한 지역이었고 이번 내전으로 지옥도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생활수준 향상이 있어왔다. [본문으로]
  4. 저자가 든 예시에는 개발도상국에선 민주주의보다 독재정치가 생활수준 향상에 더 기여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애착이 강한 서구 좌파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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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9859025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한국경제사 서적이다.


시대순으로 한국경제사를 설명하지만 흥미로운 키워드(예: 한국 중세의 특수성, 고려의 노비, 조선의 곡물저장,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등) 위주로 서술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교과서처럼 지루하지도 않고 심심풀이로 읽을 만하다. 입문용 서적이지만 여러 논문과 최신 학계동향을 언급하는 등 내용은 충분히 알차며, 한국사에 특정 현상이나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충분히 이해가도록 잘 서술했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 글솜씨는 덤.

한국사의 '경제적 측면'에 집중한 책이라 그렇게 느끼는 면도 있지만, 덕분에 한국사가 좀 새롭게 다가왔다. 


이렇게 좋은 책을 읽다보니, 한국의 역사교육이 재미없는 이유를 확실히 알겠다. 역사는 왜 이러한 현상/사건이 벌어졌는지 큰 틀에서 보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교과서 분량이 적으니 앞뒤배경 전부 짜르게 되어 인과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결국 남는 건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외우게 시키는 것.

거기에 학계에서는 이미 반박된 이론들이나 오해들(예-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인 수탈용이다)이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니, 역사교육이 유익하기는 커녕 오히려 잘못된 이해를 조장하는 면까지 존재한다.


한국경제사 입문용으로 딱 좋은 책이다. 더불어 한국의 역사교육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에게도 추천한다. 10점 만점에 8점.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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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때만 해도 소년소녀가정 이야기가 정말 많았었는데, 어느 순간 소년소녀가정 이야기가 싹 사라졌다. 

그 많은 소년소녀가정 다 어디로 갔나 싶었는데, 그냥 사라졌구나.


복지제도가 미약하게나마 성장해서 가능한 걸까. 다행이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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