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제대로 된 복지국가가 되려면 (부제-그리스와 라틴 아메리카는 왜 복지병에 걸렸는가?)
한국 보수우파들은 복지를 확대한다고 하면 곧바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꼴 날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만 맞는 이야기다. 단순히 복지 확대한다고 그리스, 베네수엘라 꼴 나진 않는다. 북유럽 국가처럼 복지 시스템을 가지고도 잘 돌아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북유럽 모델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다른 나라는? 북유럽보다 확실히 낫다 할 나라가 몇이나 될까?
북유럽 국가의 성공과 그리스-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의 실패라는 대조에서 볼 수 있듯, 복지국가 그 자체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지 않는다. 복지 시스템을 국가 능력에 맞게 운용할 줄 아는 역량이 진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그 국가적 역량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1. 생활수준 및 조세부담률에 걸맞는, 방만하지 않은 복지 시스템 운용하기
2. 인구 구조, 경제 성장 등을 고려해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3. 비효율성 및 탈세/부패로 인한, 복지로 발생할 잠재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4. 특정 기득권만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는 복지 시스템 만들기.
슬프게도 그리스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복지 시스템은 1-4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그리스는 여러 통계와 경험담을 종합할 때, 선진국 최악 수준으로 탈세 및 부패가 만연하였다. 또한 EU에 가입하여 자국 화폐(드라크마)에 비해 과도하게 고평가화된 유로화를 이용하여 복지제도를 운영하였다. 심지어 경제의 방만함을 감추기 위한 통계 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또한 공무원이 전체 노동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이들은 소득대체율 100%에 달하는 연금을 받는 등 공공부문의 방만화가 심각했다. 태초부터 지속 불가능했던 시스템은 주지하다시피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붕괴되고 만다. 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해 보자.
라틴아메리카는 두 가지 영역에서 부진하다. 첫 번째는 평등이다.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에 있어 세계에서 첫손에 꼽힌다. 일부 국가에서는 21세기 들어 불평등 지수가 약간 나아지고 있지만, 불평등의 연혁은 놀랄 만큼 오래 되었다. 두 번째의 열악함은 법치주의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인기 없는 지도자들을 내칠 수 있는 선거제도와 민주적 책임성을 묻는 제도는 비교적 잘 갖추고 있으나, 정의 실현 정책은 대체로 변변치 못하다. 이는 빈약한 사회보장에서 높은 범죄율, 제 기능을 못하는 사법부, 약하거나 안전하지 못한 재산권,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리 방치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점을 포괄한다.
이 두 가지 현상, 불평등과 약한 법치주의는 서로 관련이 있다. 법치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매우 소수의 권익만을 지키는, 다시 말해서 대기업을 경영하거나 노조에 속한 사람들만 챙겨주는 경향이 있다. 페루, 볼리비아, 멕시코에서는 무려 60 내지 70퍼센트에 이르는 국민이 이른바 비공식적 부문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대개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미등록 상태로 일한다. 그들은 고용되더라도 노동조합의 일원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공식적인 노동권 보호를 받지 못한다. 많은 브라질 빈민들은 '파벨라'라는 곳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다. 파벨라에서는 사적인 심판이 이루어지고 조직 폭력단이 마음대로 사람들을 처벌한다. 법이 불공평하게 적용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부추겨지고 있는데, 파벨라 빈민가의 사람들은 대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벨라에서는 집에 투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기 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에 희생되어도 경찰에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이런 불평등의 원인은 찾기 어렵지 않다. 대체로 상속이다. 구 엘리트의 명문 귀족들은 대개 대지주이며, 대농장을 운영하고 그 부를 대대로 물려주는 일에 성공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여기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재정 정책이 이 불평등은 더욱 심화시킨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인 나라의 재정 제도는 대체로 부유한 국민에게서 가난한 국민에게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누진세제(미국의 경우처럼)나, 소득 지원과 사회보장 지원을 해주는 방식(유럽의 경우처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재정 제도가 소득 재분배 역할은 거의 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조에 가입한 공공 부문 근무자나 대학생들 같은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득 보전을 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공식 부문의 노동자들과 모든 유형의 엘리트들은 자신의 혜택과 보조금을 지킬 수 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탈세를 하고 있다. 개인 누진세가 시퍼렇게 날이 선 미국과는 달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개인에게서는 세금을 많이 거두지 않는다. 부유한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자신의 실소득을 숨기거나 세금 징수의 손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는 데 능하다. 그것은 소비세, 관세,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잔뜩 부과된다는 뜻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정치 질서의 기원』, 함규진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 p.392-394
중남미 세금 체계의 역진성을 보여주는 짤.
위의 파란 정사각형이 세전 빈부격차(지니계수)고, 밑의 군청색(OECD)/빨간색(라틴 아메리카) 직사각형은 세후 빈부격차다. 보다시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세전 빈부격차는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심한 편 정도에 불과하나, 여타 OECD 국가들과는 달리 3 세전-세후 빈부격차 차이 즉 소득의 재분배 효과가 거의 없어 세후 빈부격차는 OECD보다 훨씬 심한 수준으로 악화된다. 이렇게 제 기능을 못하는 복지제도는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불평등으로 악명높은 지역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보았듯, 한 국가가 복지국가를 원한다면 일단 해당 국가가 복지제도를 제대로 운용할 역량이 있나를 점검하고, 그게 증명된 후에도 시스템을 지속가능하고 부패/탈법행위로부터 자유롭고 복지정책이 모두를 포괄하도록 잘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국가는 그리스-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의 길을 밟을 것이다.
물론 한국은 복지국가를 한다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의 운명을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정치적 시스템은 미흡해도 이들 국가들보다는 확실히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보다는 확실히 뒤떨어지며, 프랑스보다도 조금 낮고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 국가는 그리스나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도한 공공지출, 방만한 복지운용, 경제활력 둔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이 만약 일찍이 복지국가화를 했다면 삶은 더 여유있을지 몰라도 이탈리아, 스페인 꼴이 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화의 우려는 괴담일지 몰라도 이탈리아, 스페인화의 우려는 제법 현실화 있는 경고인 셈이다.
사실 위 인용문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구조적 결함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거기보다는 확실히 약하지만 한국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들이다. 과보호받는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 과도한 복지의 보편화로 인한 빈곤층에 대한 약한 사회보장성, 선진국치곤 약한 법치주의와 재산권 보장은 한국도 가진 문제다. 그렇기에 복지국가 역량 문제가 더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의 확실한 실패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진정한 복지국가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이런 문제를 점검하고 개혁해낸 이후에 복지국가화를 완료해야 한다.
+ '한국은 국가의 복지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서 가족에 복지를 떠넘겼다'는 식의 주장이 보이는데, 위에 설명한 이유로 황당하게 느껴질 뿐이다. 선진국 인정받는 지금도 타 선진국에 비해 부실한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가졌는데, 생활수준도 낮고 정치 사회시스템이 더 엉망이었던 70-80년대에 복지국가화를 했다면 문자 그대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꼴 났다. 아니 거긴 옛날엔 한국보다 확실히 잘 살았으니 베네수엘라화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베네수엘라와 달리 석유는 없었으니 자원의존성의 관점에선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