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이야기/학술적 이야기

선진국들의 역사적인 부채감과 개발도상국에서의 역사 인식 문제

유월비상 2019. 10. 12. 16:57

질문 하나 해보자. 왜 선진국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고, 타국과 경제적/문화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저개발국과 외교할 때 인권을 그렇게 신경쓸까? 

선진국들 절대다수가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을 중시하는 서구권 국가들이라서? 물론 그런 문화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왜 식민지기에 피식민국에 대해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 한다. 서구 선진국에 계몽주의의 확산은 식민지들 독립시키기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자국이 과거 다른 나라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현재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피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주의기에 식민지인들 혹은 '이질적인 국민들'을 대상으로 인종주의적 인식, 이로 인한 권리 박탈, 수탈, 학살 등 계몽주의의 이상을 더럽히는 만행들을 저지른 역사가 남아있다. 

미국은 미국 토착민, 흑인, 세계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인[각주:1]에게, 프랑스는 알제리와 아이티 인도차이나 등에, 영국은 아일랜드와 인도 미얀마 등에, 벨기에는 콩고에, 일본은 한국과 대만, 중국에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계몽주의의 화신처럼 군 이들이, 타국에는 반-계몽주의적인 방식으로 잔혹하게 굴었던 것이다. 이 아이러니함은 결국 계몽주의를 배운 식민지 국민들이 계몽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식민지에 저항하게 만들었고, 식민국들은 처음엔 탄압과 회유로 대응했으나 결국엔 세계 2차대전 전후로 식민지들을 죄다 독립시키고 만다. 이러한 기조는 자국 내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주축이 된 민권 운동이 일어나 흑인들의 권리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로 인해 식민국들은 자국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적어도 옛날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를 정당화하지는 못하게 되었으며, 식민주의적 인식에 대한 비판을 다룬 탈식민주의는 인문학에서 큰 조류로 부상했다. 주지하다시피 제일 극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나치 시절 세계 최악의 인종주의적 학살국가로 전락했던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등 '타국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물론 국가 차원의 사과는 홀로코스트에 국한되었으며,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의 학살 등엔 사과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래도 독일이 과거사 청산으로 돋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러시아나 일본처럼, 타국에 대한 억압으로 가득 찬 과거사를 가졌는데도 성의있게 사과하거나 사과하려는 기미도 안 보이는 나라도 있는 게 현실이니. 

이렇게 선진국은 타국의 모범이 된 자유민주주의, 화해와 협력과 같은 진보적인 면모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역설적이게도, 위선 속에서 저지른 과거의 수치스러운 역사 덕분에 그와 아주 대조되는 성취를 얻은 것이다. 물론 최근엔 서구사회에서도 포퓰리즘과 같은 위험한 배타적인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정치적 올바름과 인권 개념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직은 가치 자체가 훼손된 정도까진 아니다. 


그런데 개발도상국들은 그런 역사적 부채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과오를 저지를 국력도 없었고, 행사했더라도 '계몽주의'라는 위선 속에서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이 타국에 식민화되어 많은 것을 잃었다는 피해의식만 가득하다. 정치적 올바름, 인권과 같은 개념이 서구만큼 크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려면 자기들이 잘못했으며 잘못할 수 있다는 인식이 먼저 퍼져야 하는데, 그게 도통 이루어지질 않으니. 

이는 력이 커졌을 때 위험해지기 딱 좋은 발상이다. 자국이 타국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타국과 교류할 시 뻔뻔하게 나서거나, 약소국을 압박하거나 심지어는 전쟁범죄 등 여러 만행을 저지르는 외교를 할 위험성이 있다. 

현재 중국이 아주 좋은 예시이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서구 선진국과 달리 타국에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계속 선전하는 중이다. 골치아프게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하기도 어렵다. 티벳과 위구르 문제가 생각나긴 하지만 거긴 '일단은' 타국이 아니니까... 청나라까지의 타국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갖고 오기엔 전세계적인 일이었고, 서구처럼 계몽주의적인 위선 속에서 한 것도 아니니... 중화사상에 역사적 부채감의 부재까지 더해지니 주변국에 함부로 굴어도 된다는 오만한 인식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인식의 결과가 현재 중국의 뻔뻔한 외교이다. 

아마 전세계적인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중국과 비슷한 인식을 가진 개발도상국들이 국제정치의 장에 부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 채 뻔뻔하게 외교를 할 위험성이 높다. 우리는 그런 국가들의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 

  1. 일본 제국에 동조할지 모른다며 수용소에 가두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