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중국 외교의 근본적인 문제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에 신속히 착수했다. 그는 본인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정의 내린 것을 추구하기 위해 중국 민족에게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를 일깨웠다. 한 세대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국가가 되었다. 반드시 확신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이 극적인 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기존의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불리는) 세계 질서 규칙들을 받아들였다. 1
중국이 베스트팔렌 체제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중국을 국제적인 국가 체계에 편입시킨 역사에서 비롯된 모순이었다. 중국은 처음에 자국의 역사적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의 국제 질서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2실제로 그 국제 질서는 베스트팔렌 체제의 공언된 원칙이나 다름없었다. 국제 체계의 게임 규칙과 책임을 준수해야 한다는 권고에 고위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의 본능적인 반응은 중국이 그 체계의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과 전혀 관계가 없던 규칙들을 지키라고 요구받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그렇게 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국제규칙 제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지배적인 일부 규칙을 수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제 질서가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조만간 이러한 기대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베이징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해 왔다.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모든 국제회의는 중국의 의견과 지원을 얻으려 했다. 중국은 19세기와 20세기에 국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잡았다. 올림픽을 주최했고 주석들이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전 세계 대표적인 국가들의 정부 수반들과 상호 방문도 성사되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중국은 가장 영향력이 컸던 그 시절만큼의 위상을 다시 찾았다. 이제 문제는 중국이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현재의 세계 질서를 추구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이현주 역, 최형익 감수, 민음사, 2016, p.255-257.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활한 중국은 수천 년의 전통이었던 '조공체제'를 21세기에 맞게 부활시키고 싶어하지만, 국가 간 대등함과 주권 중시를 원칙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익숙한 주변국들은 이를 거부한다. 중국이 외교를 오만하고 무례하게 한다는 주변국들의 불평불만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외교관(觀)의 충돌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원저로는 2014년에 출간된 책이라 '조만간 이러한 기대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이다'고만 서술되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저자의 예언 그대로 행동했다. 그 결과로 남은 건 주변국들의 반중 감정 뿐이라는 게 문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중국이 낙관론자의 말대로 계속 성장해 미국을 추월하더라도 '21세기판 조공체제'가 부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중국이 국력을 지금보다 더 빨리 증진시켰고,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3와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 하다못해 중화 소프트파워라도 제대로 내세울 수 있었다면 역사적 기억이 남아있는 주변국들에 조공체제를 부분적으로나마 도입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은 둘 다 실패했고, 그 결과가 이렇다. 4
+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은 자국 국가주권의 측면에선 베스트팔렌 체제의 열혈한 지지자이다. 중국의 일당독재와 인권 문제, 티베트나 대만 홍콩 문제를 공식선상에서 조금이라도 비판해 봐라. 중국으로부터 바로 격한 어조로 '내정간섭 하지 말라'는 반발이 날아온다. 저자는 책에서 중국의 이런 모순적인 면모도 지적한다.
- 원문엔 없었지만 본인이 문맥 이해를 위해 임의로 삽입했다. 쉽게 말해 각 국가들의 주권을 중시하고, 국가 간 대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체제다. [본문으로]
- 중국을 세계 중심에 위치한 대국으로 전제하고 '하위에 있는' 타국과 외교를 하는 '조공 체제'를 말한다. 보다시피 베스트팔렌 체제와는 상극이다. [본문으로]
- 적어도 '중일전쟁 직후'부터 고속성장을 시작한다는 급은 되야 할 것 같다. 물론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같은 참사는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본문으로]
- 지금으로선 이딴 게 인류 보편 가치라는 게 믿기지 않겠지만, 냉전 초중기만 해도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사상의 두 축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