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가 서구 불평등의 대안모델이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세계적인 불평등 석학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가 실제로 한 주장이다.
21세기에는 세금과 사회적 이전이 끼어들기 이전에 개입하는 전략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러한 전략에는 자산과 교육 등 기초자본 불평등의 감소가 포함된다. 기초자본(개인의 부와 숙련기술)의 불평등이 완화된다면 재산 규모에 따른 부의 수익률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가정할 때 (세금과 사회적 이전을 차감하기 전의 소득인) 시장소득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다. 시장소득 불평등을 통제하고 장기간에 걸쳐 억제할 수 있다면 사회적 이전과 세금을 통해 정부가 하는 재분배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재분배를 덜 강조해도 괜찮다면 가처분소득 불평등의 감소야말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또는 그것이 기회 평등을 촉진하고 경제 성장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높은 세율이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이들도 만족할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대물림된 유산의 가장 유해한 측면을 제거할 수도 있다.
낮은 시장소득 불평등과 비교적 작은 정부를 결합한 경제 모형은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몇몇 아시아 국가에 존재하는 모형이다. <도표 5-1>은 특정한 서구권 국가와 한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고소득국가 세 곳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세금과 사회적 이전을 공제한)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는 세로축에, 시장소득의 지니계수는 가로축에 표시되어 있다. 한국, 대만, 일본의 가처분소득 불평등 수준은 서구 고소득국가와 거의 같다. 그러나 시장소득 불평등은 훨씬 더 낮아서 지니계수로 0.15나 차이난다. 결과적으로 주어진 가처분소득 불평등 수준에 맞추다보면 아시아의 정부 재분배가 크게 줄어들고 정부 기능 역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타이완과 캐나다를 비교해보자. 두 나라 모두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가 0.33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타이완은 재분배에 전혀 관여하지 않다시피 한다. 다시 말해 타이완의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에 대한 지니계수는 거의 같다. 또한 사회적 이전은 시장소득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에 캐나다는 세금과 사회적 이전 시스템의 규모가 커서 상대적인 수치로 따질 때 타이완의 3배나 된다. 그 결과 시장소득의 불평등 수준은 0.47,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은 0.33으로 낮아졌다.
-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서정아 역, 2017, 21세기북스, p.294-295.
인용문에 언급된 <도표 5-1>
표현이 딱딱하니 요약하자면,
조세와 복지지원 등 재분배 기능을 통한 빈부격차 감소보다는 조세나 복지지원 이전의 순수한 시장소득, 세전 상태에서의 빈부격차를 감소시키는 게 좋다. 두 방법 모두 빈부격차를 줄이는 건 똑같고, 고부담 고복지가 가져올 비효율성을 우려하는 보수우파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대만 일본 등 동북아 선진국들이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물론 이걸 보고 동북아시아 찬양을 외치기 전에, 연구되어야 할 지점들이 있다. 사실 저 책에서 저자는 저 부분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가, 저 이야기가 가설 수준이며 차후 연구가 필요함을 암시했다.
일단 개인적으로 든 의문만 따져도,
1. 동북아 선진국들의 시장소득/가처분소득(쉽게 이야기해서 세전/세후) 지니계수는 제대로 측정된 게 맞는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은 현 지니계수 수치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2. 1의 대답이 Yes라면, 어떻게 동북아에서 시장소득(세전) 격차가 낮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1
3. 2의 대답이 Yes라면, 동북아의 이 모델은 앞으로도 지속가능한가?
4. 3의 대답이 Yes라면, 서구사회는 동북아 모델을 본받을 수 있는가?
가설 수준의 이야기여도 한국인으로서 동북아시아 모델이 찬양받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서구사회가 동북아시아의 역사, 사회, 문화를 존중하자는 다문화주의적 주장이야 많이 봤지만, 그건 단순한 다름의 문제였는데 이건 단순 다름을 넘어 동북아시아의 불평등 관련 결과물이 서구 선진국보다 우수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활발하길 기원한다.
-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기초자본의 하나인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 근면함을 중시하며 범죄 등 반사회적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이게 심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테니. 툭하면 교도소와 저임금 일자리와 실업을 왔다갔다하는 미국 슬럼 주민들을 생각해보자), 다들 가난한 상태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산 불평등이 초기에 매우 낮았다는 사실 등이 있어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