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이야기/단순한 사변

인권 문제를 논의할 때 피했으면 하는 태도 3가지.

유월비상 2018. 11. 19. 23:54

책이나 통계 등 자료를 읽으면서, 국내외 인권 문제에 대한 윤곽이나마 잡힌 사람 입장에서 써본다. 


1. 국가-개인 간 인권과 개인-개인/개인-집단 간 인권을 동일시하기. 

=> 별개의 개념인데 그냥 인권으로 뭉뚱그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세상엔 단순히 국가와 개인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국가 안에는 국가-사회집단-개인이라는 삼층체계가 존재하며, 개개인은 국가 못지않게 다른 개개인, 사회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국가-개인 간 인권 못지않게 개인-개인, 개인-집단 간 인권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으로 국가-개인 간 인권문제가 많이 해결되면서, 개인-개인 및 개인-집단 간 인권문제가 두드러진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구분이 더 필요하다. 잘 와닿을 예를 들어보자면,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 독재시절에 비해 국가의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갑질은 크게 줄었으나, 상하관계에 있는 개인에서나 집단-개인 간에 벌어지는 갑질은 충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두 인권을 제대로 구분하여야 한다. 


2. 보편타당하고 엄밀한 분석 없이 일화나 자료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기

=> 이건 예시를 드는게 빠르겠다.

"한국에서 여자가 남편/남친에 의해 1년에 100명이나 죽어나간대요! 이 나라는 여성인권 시궁창인 여혐국가인듯"

이런 식의 주장을 뭐라 하고 싶진 않지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1) 5100만명이나 사는 쿤 나라에서 살인사건 자체가 안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빈도를 줄이는 것만 가능할 뿐. 1년에 100명이라는 수치를 분석하자면 매년 여성 10만 명당 0.39명(여성을 전체 인구의 절반 2550만명으로 가정 시)이 살해된다는 의미인데, 이게 한국을 '여혐국가'로 부를 정도로 큰 수치인가?

2) 연인/부부 사이의 여성대상 살인범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정부-경찰-사법부는 충분히 할 일을 하는가?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을 했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3) 외국의 여성대상 살인범죄 상황은 어떠한가? 외국에서 배우거나 반면교사로 삼을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이런 식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물론 위에 든 예시를 제대로 파보자면 학자나 관료공무원이나 가능할 정도로 깊게 들어가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보편타당하고 엄밀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게 안 되니 매일같이 감상과 분노에 젖은 영양가 없는 인권담론이 양산되고 있는 거다. 이런 식이면 해결되는 문제는 없고 다같이 정신적으로 피로해질 뿐이다.  


3. 인권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키고, 인권만을 무조건 강제하기.

=> 요즘 인권 담론이 활발하다보니 사회복지, 경제, 외교, 이민정책같은 현실정치의 영역들을 인권 문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권 문제로 보는 게 맞는 경우도 있는데, 부적절한 경우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위험할 수 있다.  

현대인에게 인권 자체는 매우 당연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이나 사상에 반인권적, 인권침해라는 낙인이 찍히면 정당화하기 굉장히 어렵다. 인권 개념을 대놓고 부정했다가는 전근대 야만인 취급을 받을 테니. 따라서 어떤 개념이나 사상을 반인권이라 해석하는 것은, 몇몇 정치세력들 입맛에 맞지 않는 개념을 반인권적으로 몰아붙여 반론을 회피하려는데 악용될 수 있다. 또 현실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갖고 이기적인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연세계이다. 절대 인권 보장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무조건적인 인권 추구는 위험할 수 있다. 

난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 가슴아파하는 정부가 "난민들은 국가의 형편에 상관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하며, 이를 어기는 경우 인권침해이다"라는 입장을 가진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시리아 난민 같은 사례가 터지면 어떻게 될까? 굳이 여기 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인권은 인류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아무렇게나 적용해도 되는 개념은 아니다. 서구사회에서 기성 진보가 인기를 잃고 극우세력이 발호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현실정치의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진보좌파들이 무조건 자기식 인권만을 부르짖고 반대하는 세력에게 미개인, 인권침해세력, 혐오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기 때문이다.


인권은 근대 사회가 만들어낸 위대한 정신적 개념이다. 이런 인권을 수호하려면, 먼저 인권 개념을 왜곡하거나 오용함으로써 이상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 개념과 그 취지에 대한 회의가 생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