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오페,『덫에 걸린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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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EU가 처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근본적으로 국가도 아니고 연합도 아닌 EU의 어정쩡한 체제가 문제였고, 거기에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질서로 인해 문제가 터졌다고 한다. EU의 기술관료화로 인한 민주적 정당성의 실추, 문제를 중재하고 책임질 EU 내 기구의 부재,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폐해, 회원국 간 심각한 불평등, 구조조정을 위한 과도한 긴축 요구, 유럽인이라는 공통된 시민의식 부재, 그 상황에서 통일화폐 유로화를 도입한 부작용 등. 그리고 해결책으론 조세의 누진성 강화, EU 구성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안전망, EU 조직의 개혁 등을 요구한다. 내가 EU를 많이 알진 못하지만 살짝 들어봤던 이야기들을 모아 정리해둔 느낌이다. EU에 빠삭한 사람은 굳이 읽을 필요까진 없는 책이다.
눈치빠른 사람은 윗 문단에서 눈치챘겠지만, 고전적인 좌파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저자가 무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고, 위르겐 하버마스의 조교인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중도-중도우파 성향인 나는 문제 분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할 것을 요구하는 등 경제를 언급한 부분이 그랬다. 신자유주의가 실체도 불확실하고, 좌파들이 보수우파 성향의 경제정책을 깎아내리려 사용하는 유행어라서 그렇다. 흔히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언급되는 통제되지 않은 국제자본이나 무조건적인 친기업정책이야 문제일 수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신자유주의로 얻는 이득도 있다. EU는 인구가 미국보다 많지만, 과학기술이나 혁신은 미국보다 뒤떨어지는 편이다. 자기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시행했다면 EU는 혁신과 국가 경쟁력에 있어서는 더 좋아졌을 것이다.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것도 좀 어이없었다. 현실성이 낮고, 앞에서 한 이야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국적, 인종, 성별 등을 막론한 EU 구성원 전체에게 적용되는 사회안전망정책을 실시하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실질적으로 부유한 국가들이 빈곤한 국가를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 이걸 부유한 EU 국가들의 국민들이 얌전히 동의해줄까? 저자들도 인정하다시피 부유한 EU국가들의 국민들은 이미 "왜 내가 저 나라들에게 돈을 퍼줘야 하지?"라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한 국가들은 빈곤한 국가에 구조조정을 빌미로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EU의 고질적 문제를 심화시켜서 EU 문제를 풀겠다는 게 가능한가? 저자는 사회안전망이 EU에 대한 불만을 불식시키고 시민의식을 형성시킬 거라 예단하지만, 그러러면 부유한 국가들에게 EU의 포괄적인 사회안전망이 EU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할 거라 설득하는 게 우선이다. 아쉽게도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무슬림 이민자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EU를 거부하게 만드는 새로운 변수에 대한 해결책은 나와있지 않다. 하다못해 차별과 편견이 무슬림 이민자를 극단화했으니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내용조차 없다. 무슬림의 동화 거부 및 과격화 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 및 빈곤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할 부분이 많은 문제이다. 저자의 해결책은 이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저자가 책을 출판한 시점(2014년 11월)은 이슬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물밑 단계에선 이슬람 문제가 분명 존재하던 때였다.
정치적 편향성 및 대안의 현실성 문제로 까대긴 했지만, 이 책이 EU의 각종 문제를 포괄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한 부분은 좋다. 사실 편향성 문제도 경제 언급한 부분만 주의하면 된다. 전문적으로 공부한다면 몰라도, EU 의 문제에 입문하기엔 나쁘진 않은 책일 듯. 그래서 개인적인 별점은 7/10.
+ 문체나 글 서술 방식이 확실히 사변적이며, 뭔가 철학적인 심오함이 느껴진다. 아마 저자가 독일 출신이라 그런가? 대륙유럽 출신 저자들은 영미출신과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내가 읽어본 책들은 다 이런 식이었다.
++ 저자는 언급을 피하려 했지만, 어조를 보면 EU의 미래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는 듯 하다. EU가 지금 그대로 존속되도 문제고, 붕괴되면 더 문제고. 심지어 해결책이 실현가능한지에도 자신이 없어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가 내놓은 해결책의 비현실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