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인지도 낮지만 효과적인 방법
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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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 간의 경쟁 관계는 소위 ‘조선족 혐오’가 아닌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동포 노동자들이 적잖은 일자리를 장악해 나가는 이유는 일을 더 싸게 하기 때문”으로 “내외국인 간 임금 격차를 없애야 이런 경쟁도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 서독 노총에서 요구했던 게 동독 노동자들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어요. 안 그러면 값싼 동독 노동자에게 모든 일이 쏠리고, 노동자들의 지위도 함께 지키기 어려워지기 때문인 거죠.” 모든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개선을 해나갈 때 내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함께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보는 다문화 가정 지원 방법론도 비슷하다. ‘다문화’로 별도 구획을 해 특정 지원을 해나가기보다는 보편 복지를 통해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하자는 것. 박 교수는 “소위 다문화 지원을 하겠다면서 한 학급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만 뽑아 놀이공원으로 현장 학습을 보내 주는 식의 거친 지원이 너무 많다”라며 “이를 보는 다른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에는 ‘다문화 가정 아이는 당연히 차별받는다’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어려움은 대부분 ‘다문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빈곤 가정’이라 발생한 것들이에요. 보편 복지로 빈곤 가정, 위기 가정을 적극 보살피면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죠.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다문화 가정 친구를 차별하면 안 돼요’라고 가르칠 게 아니라 ‘친구를 차별하는 건 나쁜 거예요’라고 가르치면 될 일이죠.”
출처: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22189036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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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 100% 동의하진 않지만 발상 자체가 흥미로웠다.
기사엔 외노자와 다문화가정 이야기만 나오지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소수자의 정체성에 몰두하기보단 보편주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라...
소수자의 정체성에 몰두한 정책은 다른 사회적 갈등만 양산시킬 뿐이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읽었던 불평등 관련 서적 구절이 떠오른다.
실존적 불평등[맥락 상 집단 간 존재하는 자율성, 존엄, 자유, 권리 등의 불평등을 말한다]에만 외곬으로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이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소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데 성공하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따른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1차적 목표가 성별이나 인종 간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반적인 소득 불평등의 감소를 추진하는 편이 좀 더 바람직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시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수평적 불평등[집단 간 존재하는 불평등]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편, 전반적이고 일반적인 불평등을 방치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실존적 불평등의 해소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정체성 정치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변화를 일으켜야 유리한 집단끼리 뭉쳐 국민이 분열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이 스스로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춤에 따라 공동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단의 불만이 해소되면 다른 집단의 곤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둘째, 실존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면 근본적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들어보자. 여성주의자를 비롯한 많은 이가 성매매를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로 간주하며 이를 금지하거나 성매매 종사자에 대한 교육을 통해 그만두게 하거나 주로 남성으로 이루어진 매수자를 처벌함으로써 수요를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성별이라는 틀에 얽매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음성화될 뿐이다. 또한 성매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헛수고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의 근본 원인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다. 이 세상에는 소득이 높은 남성과 가난하고 일자리를 얻을 가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이 많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성매매가 국가적으로나 (섹스 관광에서 보듯이) 세계적으로나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관건은 성 불평등 해소에 치중하기보다는 성매매의 경제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 있다. 남성과 여성의 수평적 소득 불평등이 해소된다고 가정해보자. 여성의 졸업률이 남성을 앞서고 점점 더 부유한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성 매수자의 90%가 남성이고 성 노동자의 90%가 여성인 현실이 성 매수자와 성 노동자가 '공평'하고 '성별 중립적'인 분포를 보이는 상황으로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성 매수자나 성 노동자나 남녀 비율이 반반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성매매 반대론자들은 이러한 성과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매매가 성별로 균형적인 것으로 바뀐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성매매 문제의 근본 원인이 남녀 소득 격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 실존적 평등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손쉽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물론 보상도 크지 않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적 평등을 추진하면 우파 정치인과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할 일도 없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기본 구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적 평등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의미 있는 변화를 내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법적 평등을 이루는 단계까지만 염두에 둔다. (중략) 정체성에만 치중하는 이들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출발선 위에 올려놓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 선 위에 선 사람이 페라리 안에 있는지, 자전거를 타고 있는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출발선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들이 임무 종료를 선언한 바로 그 순간에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 『30년 세계화가 남긴 빛과 그림자 -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브랑코 밀라노비치 저, 서정아 역, 21세기북스, 2017, p. 305-308.
읽으면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보니,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이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경제적 하류/빈곤층의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빈곤/불평등 정책은 곧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을 위한 정책이다. 정체성 언급 없이도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후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셈이다. 1
물론 불평등/빈곤 해결도 세금이 걸린 문제라 해결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문제의 복잡성과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사회적 소수자/정체성 이슈보단 훨씬 쉬울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체성 놀음은 파면 팔수록 노답이라는 결론밖엔 안 나오는 것 같다.
- 높다고 한 건 예외가 있어서이다. The Economist에 따르면 레즈비언은 이성애자 여성에 비해 소득이 더 높다고 한다. 임신 자체가 불가능해 임신으로 인한 소득, 승진, 커리어상의 불이익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레즈비언이 이성애자보다 강자라 보긴 어렵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