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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 종교적 광신, 빈곤, 독재, 종파 갈등, 내전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분쟁지역이 된 근원을 다룬 책. 3-4년 전에 사놓고 어제야 다 읽었다. 

이 책에선 중동이 분쟁지역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세계 1차대전 직후 멸망하고 여러 국가들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그 기간인 1910-1922년의 중동 역사를 900페이지에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주제가 딱딱해 보이는데도 술술 잘 넘어가는 책이다. 1910-22년 사이의 중동사를 정치인과 국가들의 시점에서 몰입감 있고 재미있게 묘사해간 저자와 깔끔하게 번역해낸 번역자 덕분이다. 덕분에 900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을 비교적 쉽게 완독할 수 있었다. 보석같은 책 내용을 머리 속에 솔솔 들어오도록 한 저자와 번역자에게 감사한다. 


그렇다면 왜 중동은 지금같은 분쟁지역이 되었을까? 900페이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중동에 관여했던 행위자들 전부 상상 이상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새x들이어서. 


저때 중동엔 국가 단위든 정치인 단위든 관료 조직 단위든 제대로 된 행위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만 (오스만에서의) 아랍 독립세력 전부 다. 보면서 한숨나오고 뒷골땡기고 뒷목잡은 부분이 한 두 구절이 아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동지역의 역사나 지리와 무관한, 자기들 이익에 맞춘 자의적인 국경선을 그은 것이 중동 재앙의 시작이었다'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했을 줄은 몰랐다. 전에 인용했던 이 구절은 수많은 막장행태 모음집의 하나일 뿐이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문제만도 아니라 더 놀라울 따름이다. 문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얼마나 일이 엉망으로 돌아갔냐면, 현대 중동이 지금보다도 더한 극한상황이어도 충분히 납득됐을 정도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는 책 읽고 인상이 더 나빠졌다. 이게 위대한 제국들의 속살인가 싶었다.  

일일히 인용하기엔 너무 많으니, 문제가 된 행태들의 패턴만 언급해보자. 

1. 내부 조율의 부재. 국가 내에서 의견 통일이 좀체 되질 않는다. 아니 국가 내 정도면 양반이고 조직 내부에서도 온갖 내분이 일어난다. 건설적이지 못하며 문제해결을 방해할 정도로. 

2. 명령/지휘체계의 무력화. 조직의 중간관리자가 상부 보고 없이 제 멋대로 행동한다. 

3. 정확한 정보통신의 부재. 통신 문제로 명령이 제대로 하달되지 않아 엉뚱한 지꺼리를 하고 만다.   

4. 상식을 뛰어넘는 무모한 군사작전들. 아무리 20세기 초였다지만 정말 정신 나간 작전이 많았다.

5. 상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의 부재. 그 위대한 대영 제국에서, 세계 1차대전 발발 시점에 (전쟁 상대국) 오스만의 역사나 문화를 상세하게 설명한 책이 한 권 뿐이었다는 게 말이 되냐? 

6. 모호하며 수도 없이 바뀌는 동맹과 적. 세계 1차대전 일어나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어느 나라가 누구랑 한 편을 맺을 지 확실하지 않았으며, 세계 1차대전 중엔 러시아에서 혁명이 벌어지고 터키에서 술탄과 신흥세력이 대립하면서 기존의 동맹-적 구도가 완전히 꼬여버렸다. 

7. 타국과 중요한 협약을 맺는 데 실무 경험 없는 신입 공무원을 두기.  

8. 기초적인 사실관계 파악도 안 하고 대충대충 약속하고 협약 맺기.

8-1. 그리고 몇 달 만에 괜히 약속/협약 맺었다고 후회하기.   

9. 자기 이익을 위해 손바닥 뒤집듯 말 바꾸기. 

10. 약속/협약을 모호하게 맺어 해석으로 2라운드 분쟁 벌어지게 하기.


이런 식의 행태를 모든 행위자들이 상습적으로 해댔으니 중동이 멀쩡한 게 더 이상할 거다. 여기 나온 행위자 모두 경영학/MBA 수업 시간에 '실패한 조직'의 사례로 내밀어도 할 말 없다. 3,6번이야 외부 조건이 안 좋았다 쳐도, 나머지는 실드를 쳐 줄 수가 없다. 이렇게 면밀하게 따져들어가면 문제 없는 조직이 없겠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물론 행위자들이 병x이라서 중동이 이렇게 된 것만은 아니다. 중동은 서구 열강들과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지역이며, 아예 세상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아니 달랐다 정도도 순화된 표현이고, 동은 굳이 유럽인이 아니더라도 외부인이 통치하고 관리하기 정말 어려운 지역이었다.

확실한 역사와 영토, 내부 시스템을 갖춘 국민국가로 가득한 유럽과 달리, 세계 1차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중동엔 오스만이나 이란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형태 갖춘 나라들이 없었다. 그나마 오스만 이란 모두 제국이라 유럽식 국민국가는 아예 없고,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동엔 이집트 정도를 제외하면 오스만과 이란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역사를 지닌 지역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동 전 지역을 오스만과 이란 이집트 차지로 만들 수도 없었다. 두 나라 모두 점차 영토를 잃고 몰락해가면서, 중동 지역 상당 부분이 무질서화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아예 영국이 가져갔고. 거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쪽은 헤자즈[각주:1]의 후세인 세력과 리야드[각주:2]의 사우드 세력이 서로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겠다고 싸워대는 혼란의 상황이었다. 거기에 중동인들은 서구식 세속주의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슬람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비무슬림이 자기 지역 지도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사우드 세력은 이슬람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와하비즘의 계승자였다. 

이런 식이었으니, 서구 열강이 중동 지역을 재편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중동을 다루려 했고, 자기 이해관계를 위해 중동을 이용하려 들다 문제를 악화시킨 건 백 번 까여야 마땅하지만, 유럽의 행태가 약간이나마 이해는 간다.


분량이 정말 많은데 정말 내용이 알차다. 읽기에도 편하고. 내 인생의 책으로 꼽을만한 명저다. 10점 만점에 10점. 분량이 많고 비싸지만, 현대 중동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책이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1. 아라비아 반도의 중서부 해안지역.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해 있다. [본문으로]
  2.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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