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참석자들을 포함해 모든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조약[제1차 세계대전 평화협정] 내용이 관련 지역 및 주민들에 대한 지식이나 그에 대한 고려 없이 결정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유럽에 부과된 조약 내용이 그 정도였으니 거리상으로도 멀고 생소한 중동 같은 지역에 부과된 내용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아서 밸푸어만 해도 평화회의에 참석한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ㅡ모리스 행키의 전문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ㅡ를 가리켜 "이 전능하면서 또 전적으로 무지한 세 거두가 회의장에 앉아 어린애 같은 인물의 지도를 받으며 대륙들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꼬집어 말했고, 이탈리아의 외교관도 이렇게 썼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세계의 이런저런 정치인들이 지도 앞에 서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시나 강을 찾으려고 손가락으로 지도 위 그림을 더듬어가며 '그 빌어먹을 곳이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라고 투덜대는 모습이었다." 로이드 조지도 (성서의 구절을 빌려) 단에서 브엘세바(베에르셰바)까지의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통치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정작 단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19세기 성서 지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년 후 앨런비 장군으로부터 단의 위치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원하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경계선을 북쪽으로 더 이동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 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이순호 역, 갈라파고스, 2015, p.609
서구 열강이 피식민국의 역사/지리에 무지했고 식민지배의 편리를 위해 국경을 자의적으로 그은 건 알고 있었지만, 주먹구구, 나이브함과 무책임함의 레벨이었을 줄은 몰랐네.
이건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신기한 수준이다. 중동이 분쟁지역이 된 건 예상된 바다.
+ 참고로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구 정치인들이 세계 1차대전에서 중동지역에 저지른 뻘짓과 삽질은 책을 따로 써야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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