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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비평을 전공하는 지인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다. SF하면 흔히 떠올리는 '기발한 상상력을 뽐내는' 작품들은 한 물 갔고, 지금은 상상력의 전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과학기술 이면의 인간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는 게 유행한다고.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 얼마나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직 SF 거장인 테드 창의 작품들은 그랬으며, 지금 소개하는 김초엽의 작품들도 그렇다. 둘의 문체, 소재와 문제의식은 확실히 다르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좋은 작품인지 확신을 하지 못했다. 책 띠지와 출판사 책 소개글의 내용들을 보고 '정치적 올바름'의 냄새가 많이 느껴졌다. 소수자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라... 오해하지 말라. 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주장의 큰 틀엔 동의하며, 소수자들을 불쾌하게 할 언행은 삼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사유에 과도하게 집착해서 이 세상에 정치적 올바름만 존재하는 양 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옳은 주장을 많이 하지만, "소수자들을 혐오와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자"는  뻔한 구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으며, 과도하게 투쟁적이고 과도하며 엉뚱한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 잘못은 아니지만, 공허한 사고를 가졌기에 과격하고 교조적이기만 하니 문제다.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예술작품들도 비슷하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긴 하지만 그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치 말고는 알맹이 없는 공익광고같은 진부함을 보여주며, 정치적 올바름에 박혀 개성 없이 완성도 낮은 작품성만 드러날 뿐이다. 나는 이 소설집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정치적 올바름에서 이야기하는 문제의식이 글 곳곳에서 묻어났지만, 저자는 그러면서도 완성도 높고 기발한 SF작품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소개글에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집엔 작가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 유전자 조작 실험의 피해자와 개량된 '신인류'에 대비되는 약자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경제적 이해타산의 논리로 항로가 폐선되어 우주 너머의 가족을 볼 수 없게 된 안나(「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모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고통받은 어머니(「관내분실」), 잘못을 했지만 여자라 더 공격받은 재경 우주비행사(「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등.. 소수자가 소설 전개를 주도하는 부분도 많았다. 주역인 여성 등장인물들이 많았으며, 레즈비언도 나타나고 심지어 두 미혼모와 이들의 네 자녀로 구성된 비정상가족[각주:1](「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수자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은 소수자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 장치들은 서사의 한 요소로서 드러날 뿐이었으며, 저자가 이 장치를 쉽게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를 풀어나가는 SF소설이라는 양식 덕분인지, 사회적 소수자는 서사 표면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제대로 읽기 위해 서사를 한 가닥 걷어내서야 주제의식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는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연민과 사랑의 정서에서 더 확실해진다. 이 소설집은 SF소설이지만 과학기술 못지 않게 개개인과 사람 간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가족력, 개인 사정, 성격, 취향, 정서 전체를 깊게 훑어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암시된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오해하고, 싸우고, 감정을 품으나, 끝에 가서는 이해와 인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스펙트럼」과 「공생 가설」이 좋은 예시이다. 이 두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외계의 존재를 인식하며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기초적인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는 존재들이라 결말에 가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듯 하나, 서로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볼 수 있었다. 인류가 문자 그대로 외계의 존재조차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부조리해 보이는 사람들의 언행이나 사회현실조차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런 사고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차별화, 신분화된 세계를 개탄한 릴리는 기계적 조작을 통해 차별도 혐오도 없는 대안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올리브는 그런 이상향조차 인간미 없는 불완전한 세계일 뿐이며, 떠난 세계에는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결국 올리브는 원래 세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곳에서 같이 맞서겠다고 다짐한다.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걸 넘어, 무작정 차별과 혐오를 없애려는 유토피아적인 시도에도 반발하다니. 더 나아가 저 너머에 억압받는 존재와 연대하려 하다니. 투쟁과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깊이있는 생각과 따스함을 앞세운 사고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보기 힘들다 보니 그립게 느껴질 정도다. 개인적으로 소설집 전체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또한 이 소설들의 신개념 과학기술들은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며, 이는 소설의 미묘한 정체성을 만들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온 안나를 좌절시킨 경제논리는 2020년의 세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며,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재경 우주비행사의 자격에 대한 논란은 이소연을 향한 논란을 연상시켰다. 이소연을 모티브로 해서 쓴 단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감정의 물성」 에피소드는 내일 바로 이 지구에 현실화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순수한 장르 SF문학보다는 SF문학이라는 언어를 빌려 쓴 사회비평소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위에도 써놨듯 SF문학이 순수한 과학기술의 공상력을 뽐내던 시절은 떠난 듯 하지만. 

 전반적으로 높은 완성도와 깊은 생각이 느껴진 좋은 작품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소설들이 '약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에만 치중했다는 거다. 약자에 대한 문제의식은 중요하지만, 단편들 한두어개 빼고 전부 약자들 문제를 언급하니 읽다보면 살짝 싫증난다. 작가의 문제의식, 소재 고르는 능력과 서사 전개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 감정이 상쇄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다음 작품엔 더 재미있는 소재와 발상을 통해 더 간접적으로 드러냈으면 좋겠다. 첫 작품을 이 수작으로 낸 작가는 분명 할 수 있다. 


  1. 정상가족은 전통적인 가정 형태, 즉 두 이성애자 남녀 부부와 자식들로 구성된 가정의 형태를 말한다. 이런 가족만이 정상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선 미혼모, 동거 커플, 동성애자 부부 등 이질적인 형태의 가정은 인정받지 못한다. 비정상가족을 이를 넘어선 형태의 가족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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