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정부에 대한 책을 읽다, 개인적으로 압권이었던 장면이 있어 한번 옮겨본다.
배넌의 확신에 따르면 새 트럼프 행정부의 첫 행보는 이민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외국인 문제에서 트럼피즘에 대한 열광의 완벽한 예를 볼 수 있었다. 이 주제를 띄우면 흔히 외골수 과격파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묵살당했지만ㅡ제프 스세션스는 그런 까다로운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ㅡ트럼프는 많은 이들이 외국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왔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트럼프 이전에 배넌은 이 문제에 관해 세션스와 연대했었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은 자국민보호주의nativism가 정말로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알아볼 수 있는 갑작스러운 기회였다. 그리고 그들이 승리했을 때 배넌은 자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책에 열과 성을 다할 거라는 선언을 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해했다. 더구나 그것은 진보주의자들을 치게 떨릴 만큼 분노케 하는 이슈였다.
(중략)
진정한 목표는 진보적 견해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진보적 세계주의자들은 법과 규칙과 관습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의 신화를 추구했다. 그것은 진보진영이 갖는 이중의 위선이었다. 왜나면 쉬쉬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불법 체류 외국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보진영이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간단한 겁니다." 배넌이 말했다.
배넌은 처음부터 진보적이지 않은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자만심을 아예 벗겨내려는 의도로 행정명령을 추진했다. 그는 최소한의 혼란을 일으키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진보주의자들을 붙잡아두는 데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중략)
1월 27일 금요일에 여행금지 명령에 대한 서명이 이뤄졌고 명령은 즉시 발효됐다. 그에 따라 진보 매체의 혐오와 분노가 쏟아졌고, 이민사회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주요 공항에서 격앙된 시위가 벌어지고, 온 정부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백악관에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설교와 경고, 비난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지금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나? 이 일은 없던 걸로 돌려놓아야 해! 당신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버렸어! 대체 누가 이 일을 책임지고 있지?'
그러나 스티븐 배넌은 만족했다. 그는 두 개의 미국을 가르는 선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그리기를 바랄 수 없었다. 그것은 트럼프와 진보진영 사이의 선이며 그 자신의 백악관과 아직 모든 걸 태워 없애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백악관 사이의 선이었다.
'우리는 왜 하필 금요일에 이 일을 해야 했지? 수많은 공항에 가장 큰 파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시위를 불러일으킬 날에?' 거의 모든 백악관 직원들이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배넌은 이렇게 말했다. "음... 왜나하면 잘나빠진 진보주의자들이 공항에 나타나고 소동이 벌어질 테니까." 그것이 바로 진보주의자들을 짓밟는 방식이었다. 그들을 미쳐버리게 하고 더 극단적인 좌파로 끌려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 마이클 울프, 『화염과 분노』, 장경덕 역, 은행나무, 2018, p.110-116.
총평
자칭 현대 선진국의 정치.jpg
사회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빡치게 만들고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라니. 참 신박하지 아니한가.
멀쩡한 사람들도 편 갈라 싸우게 만든다는 분열쟁점(wedge issue)의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분열쟁점을 위한 정치는 자기 진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술수일 뿐이다. 상대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인 건 처음 본다.
포퓰리즘의 위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지만, 그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듯 하다. 내가 졌다.
+ 저런 발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관련 부분을 추가로 인용해보자면,
별것 아니지만 배넌의 정치 경력 전부가 정치 매체에 있었다. 그것은 또한 인터넷 매체였다. 다시 말해 즉각적인 반응에 지배되는 매체였다. <브레이트바트>의 공식은 진보주의자들을 질리게 해서 기본 독자들을 이중으로 만족시킴으로써, 혐오와 기쁨이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클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적의 반응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 갈등은 미디어의 미끼였고 이제 정치의 밑밥이었다. 새로운 정치는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갈등의 기술이었다.
- 마이클 울프, 『화염과 분노』, 장경덕 역, 은행나무, 2018, p.111-112.
배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터넷과 SNS가 지배적인 시대의 정치 역학은 과거와 확실히 다르다. 포퓰리스트들의 득세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이 역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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