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은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에 신속히 착수했다. 그는 본인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정의 내린 것을 추구하기 위해 중국 민족에게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를 일깨웠다. 한 세대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국가가 되었다. 반드시 확신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이 극적인 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기존의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불리는)[각주:1] 세계 질서 규칙들을 받아들였다.

 중국이 베스트팔렌 체제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중국을 국제적인 국가 체계에 편입시킨 역사에서 비롯된 모순이었다. 중국은 처음에 자국의 역사적 이미지[각주:2]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의 국제 질서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실제로 그 국제 질서는 베스트팔렌 체제의 공언된 원칙이나 다름없었다. 국제 체계의 게임 규칙과 책임을 준수해야 한다는 권고에 고위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의 본능적인 반응은 중국이 그 체계의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과 전혀 관계가 없던 규칙들을 지키라고 요구받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그렇게 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국제규칙 제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지배적인 일부 규칙을 수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제 질서가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조만간 이러한 기대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베이징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해 왔다.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모든 국제회의는 중국의 의견과 지원을 얻으려 했다. 중국은 19세기와 20세기에 국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잡았다. 올림픽을 주최했고 주석들이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전 세계 대표적인 국가들의 정부 수반들과 상호 방문도 성사되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중국은 가장 영향력이 컸던 그 시절만큼의 위상을 다시 찾았다. 이제 문제는 중국이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현재의 세계 질서를 추구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이현주 역, 최형익 감수, 민음사, 2016, p.255-257.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활한 중국은 수천 년의 전통이었던 '조공체제'를 21세기에 맞게 부활시키고 싶어하지만, 국가 간 대등함과 주권 중시를 원칙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익숙한 주변국들은 이를 거부한다. 중국이 외교를 오만하고 무례하게 한다는 주변국들의 불평불만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외교관(觀)의 충돌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원저로는 2014년에 출간된 책이라 '조만간 이러한 기대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이다'고만 서술되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저자의 예언 그대로 행동했다. 그 결과로 남은 건 주변국들의 반중 감정 뿐이라는 게 문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중국이 낙관론자의 말대로 계속 성장해 미국을 추월하더라도 '21세기판 조공체제'가 부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중국이 국력을 지금보다 더 빨리 증진시켰고[각주:3],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각주:4]와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 하다못해 중화 소프트파워라도 제대로 내세울 수 있었다면 역사적 기억이 남아있는 주변국들에 조공체제를 부분적으로나마 도입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은 둘 다 실패했고, 그 결과가 이렇다. 


+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은 자국 국가주권의 측면에선 베스트팔렌 체제의 열혈한 지지자이다. 중국의 일당독재와 인권 문제, 티베트나 대만 홍콩 문제를 공식선상에서 조금이라도 비판해 봐라. 중국으로부터 바로 격한 어조로 '내정간섭 하지 말라'는 반발이 날아온다. 저자는 책에서 중국의 이런 모순적인 면모도 지적한다.


  1. 원문엔 없었지만 본인이 문맥 이해를 위해 임의로 삽입했다. 쉽게 말해 각 국가들의 주권을 중시하고, 국가 간 대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체제다. [본문으로]
  2. 중국을 세계 중심에 위치한 대국으로 전제하고 '하위에 있는' 타국과 외교를 하는 '조공 체제'를 말한다. 보다시피 베스트팔렌 체제와는 상극이다. [본문으로]
  3. 적어도 '중일전쟁 직후'부터 고속성장을 시작한다는 급은 되야 할 것 같다. 물론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같은 참사는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본문으로]
  4. 지금으로선 이딴 게 인류 보편 가치라는 게 믿기지 않겠지만, 냉전 초중기만 해도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사상의 두 축이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질문 하나 해보자. 왜 선진국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고, 타국과 경제적/문화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저개발국과 외교할 때 인권을 그렇게 신경쓸까? 

선진국들 절대다수가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을 중시하는 서구권 국가들이라서? 물론 그런 문화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왜 식민지기에 피식민국에 대해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 한다. 서구 선진국에 계몽주의의 확산은 식민지들 독립시키기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자국이 과거 다른 나라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현재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피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주의기에 식민지인들 혹은 '이질적인 국민들'을 대상으로 인종주의적 인식, 이로 인한 권리 박탈, 수탈, 학살 등 계몽주의의 이상을 더럽히는 만행들을 저지른 역사가 남아있다. 

미국은 미국 토착민, 흑인, 세계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인[각주:1]에게, 프랑스는 알제리와 아이티 인도차이나 등에, 영국은 아일랜드와 인도 미얀마 등에, 벨기에는 콩고에, 일본은 한국과 대만, 중국에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계몽주의의 화신처럼 군 이들이, 타국에는 반-계몽주의적인 방식으로 잔혹하게 굴었던 것이다. 이 아이러니함은 결국 계몽주의를 배운 식민지 국민들이 계몽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식민지에 저항하게 만들었고, 식민국들은 처음엔 탄압과 회유로 대응했으나 결국엔 세계 2차대전 전후로 식민지들을 죄다 독립시키고 만다. 이러한 기조는 자국 내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주축이 된 민권 운동이 일어나 흑인들의 권리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로 인해 식민국들은 자국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적어도 옛날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를 정당화하지는 못하게 되었으며, 식민주의적 인식에 대한 비판을 다룬 탈식민주의는 인문학에서 큰 조류로 부상했다. 주지하다시피 제일 극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나치 시절 세계 최악의 인종주의적 학살국가로 전락했던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등 '타국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물론 국가 차원의 사과는 홀로코스트에 국한되었으며,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의 학살 등엔 사과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래도 독일이 과거사 청산으로 돋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러시아나 일본처럼, 타국에 대한 억압으로 가득 찬 과거사를 가졌는데도 성의있게 사과하거나 사과하려는 기미도 안 보이는 나라도 있는 게 현실이니. 

이렇게 선진국은 타국의 모범이 된 자유민주주의, 화해와 협력과 같은 진보적인 면모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역설적이게도, 위선 속에서 저지른 과거의 수치스러운 역사 덕분에 그와 아주 대조되는 성취를 얻은 것이다. 물론 최근엔 서구사회에서도 포퓰리즘과 같은 위험한 배타적인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정치적 올바름과 인권 개념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직은 가치 자체가 훼손된 정도까진 아니다. 


그런데 개발도상국들은 그런 역사적 부채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과오를 저지를 국력도 없었고, 행사했더라도 '계몽주의'라는 위선 속에서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이 타국에 식민화되어 많은 것을 잃었다는 피해의식만 가득하다. 정치적 올바름, 인권과 같은 개념이 서구만큼 크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려면 자기들이 잘못했으며 잘못할 수 있다는 인식이 먼저 퍼져야 하는데, 그게 도통 이루어지질 않으니. 

이는 력이 커졌을 때 위험해지기 딱 좋은 발상이다. 자국이 타국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타국과 교류할 시 뻔뻔하게 나서거나, 약소국을 압박하거나 심지어는 전쟁범죄 등 여러 만행을 저지르는 외교를 할 위험성이 있다. 

현재 중국이 아주 좋은 예시이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서구 선진국과 달리 타국에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계속 선전하는 중이다. 골치아프게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하기도 어렵다. 티벳과 위구르 문제가 생각나긴 하지만 거긴 '일단은' 타국이 아니니까... 청나라까지의 타국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갖고 오기엔 전세계적인 일이었고, 서구처럼 계몽주의적인 위선 속에서 한 것도 아니니... 중화사상에 역사적 부채감의 부재까지 더해지니 주변국에 함부로 굴어도 된다는 오만한 인식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인식의 결과가 현재 중국의 뻔뻔한 외교이다. 

아마 전세계적인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중국과 비슷한 인식을 가진 개발도상국들이 국제정치의 장에 부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 채 뻔뻔하게 외교를 할 위험성이 높다. 우리는 그런 국가들의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 

  1. 일본 제국에 동조할지 모른다며 수용소에 가두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경제 성장은 단순히 개도국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행위 그 이상이다. 개도국에 예상되는 기후 변화의 피해를 줄이는데도 성장이 필요하다.

1. 경제 성장은 기후 변화에 대비할 자금과 인프라를 만들어낸다.  

2. 경제 성장은 보통 1차 산업의 비율을 낮추고 도시화를 촉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기후 변화에 노출되어 생기는 피해를 줄인다. 

내용 출처: 윌리엄 노드하우스, 『기후 카지노』, 황성원 역, 한길사, 2017


갑자기 생각나서 올려본다.

1은 예전부터 알았던 건데, 2는 좀 생경하게 다가왔다. 생각하면 당연한 거지만. 

'생태계 붕괴와 멸종의 시대인데도 돈과 영원한 경제 성장이라는 꾸며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UN에서 하소연했으나, 그녀 주장의 전제와는 달리 기후 변화의 시대에도 성장은 필요하다. 어쩌면 기후 변화의 시대라서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선진국이라면 몰라도 개발도상국들은 아직도 많은 성장이 필요하다. 


Posted by 유월비상
,

한국 보수우파들은 복지를 확대한다고 하면 곧바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꼴 날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만 맞는 이야기다. 단순히 복지 확대한다고 그리스, 베네수엘라 꼴 나진 않는다. 북유럽 국가처럼 복지 시스템을 가지고도 잘 돌아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북유럽 모델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다른 나라는? 북유럽보다 확실히 낫다 할 나라가 몇이나 될까? 

북유럽 국가의 성공과 그리스-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의 실패라는 대조에서 볼 수 있듯, 복지국가 그 자체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지 않는다. 복지 시스템을 국가 능력에 맞게 운용할 줄 아는 역량이 진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그 국가적 역량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1. 생활수준 및 조세부담률에 걸맞는, 방만하지 않은 복지 시스템 운용하기 

2. 인구 구조, 경제 성장 등을 고려해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3. 비효율성 및 탈세/부패로 인한, 복지로 발생할 잠재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4. 특정 기득권만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는 복지 시스템 만들기.

슬프게도 그리스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복지 시스템은 1-4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그리스는 여러 통계와 경험담을 종합할 때, 선진국 최악 수준으로 탈세 및 부패가 만연하였다. 또한 EU에 가입하여 자국 화폐(드라크마)에 비해 과도하게 고평가화된 유로화를 이용하여 복지제도를 운영하였다. 심지어 경제의 방만함을 감추기 위한 통계 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또한 공무원이 전체 노동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이들은 소득대체율 100%[각주:1]에 달하는 연금을 받는 등 공공부문의 방만화가 심각했다. 태초부터 지속 불가능했던 시스템은 주지하다시피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붕괴되고 만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해 보자. 

라틴아메리카는 두 가지 영역에서 부진하다. 첫 번째는 평등이다.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에 있어 세계에서 첫손에 꼽힌다. 일부 국가에서는 21세기 들어 불평등 지수가 약간 나아지고 있지만, 불평등의 연혁은 놀랄 만큼 오래 되었다. 두 번째의 열악함은 법치주의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인기 없는 지도자들을 내칠 수 있는 선거제도와 민주적 책임성을 묻는 제도는 비교적 잘 갖추고 있으나, 정의 실현 정책은 대체로 변변치 못하다. 이는 빈약한 사회보장에서 높은 범죄율, 제 기능을 못하는 사법부, 약하거나 안전하지 못한 재산권,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리 방치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점을 포괄한다.

이 두 가지 현상, 불평등과 약한 법치주의는 서로 관련이 있다. 법치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매우 소수의 권익만을 지키는, 다시 말해서 대기업을 경영하거나 노조에 속한 사람들만 챙겨주는 경향이 있다. 페루, 볼리비아, 멕시코에서는 무려 60 내지 70퍼센트에 이르는 국민이 이른바 비공식적 부문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대개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미등록 상태로 일한다. 그들은 고용되더라도 노동조합의 일원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공식적인 노동권 보호를 받지 못한다. 많은 브라질 빈민들은 '파벨라'라는 곳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다. 파벨라에서는 사적인 심판이 이루어지고 조직 폭력단이 마음대로 사람들을 처벌한다. 법이 불공평하게 적용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부추겨지고 있는데, 파벨라 빈민가의 사람들은 대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벨라에서는 집에 투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기 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에 희생되어도 경찰에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이런 불평등의 원인은 찾기 어렵지 않다. 대체로 상속이다. 구 엘리트의 명문 귀족들은 대개 대지주이며, 대농장을 운영하고 그 부를 대대로 물려주는 일에 성공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여기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재정 정책이 이 불평등은 더욱 심화시킨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인 나라의 재정 제도는 대체로 부유한 국민에게서 가난한 국민에게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누진세제(미국의 경우처럼)나, 소득 지원과 사회보장 지원을 해주는 방식(유럽의 경우처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재정 제도가 소득 재분배 역할은 거의 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조에 가입한 공공 부문 근무자나 대학생들 같은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득 보전을 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공식 부문의 노동자들과 모든 유형의 엘리트들은 자신의 혜택과 보조금을 지킬 수 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탈세를 하고 있다. 개인 누진세가 시퍼렇게 날이 선 미국과는 달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개인에게서는 세금을 많이 거두지 않는다. 부유한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자신의 실소득을 숨기거나 세금 징수의 손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는 데 능하다. 그것은 소비세, 관세,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잔뜩 부과된다는 뜻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정치 질서의 기원』, 함규진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 p.392-394

[각주:2]

중남미 세금 체계의 역진성을 보여주는 짤. 

위의 파란 정사각형이 세전 빈부격차(지니계수)고, 밑의 군청색(OECD)/빨간색(라틴 아메리카) 직사각형은 세후 빈부격차다. 보다시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세전 빈부격차는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심한 편 정도에 불과하나, 여타 OECD 국가들과는 달리[각주:3] 세전-세후 빈부격차 차이 즉 소득의 재분배 효과가 거의 없어 세후 빈부격차는 OECD보다 훨씬 심한 수준으로 악화된다. 이렇게 제 기능을 못하는 복지제도는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불평등으로 악명높은 지역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보았듯, 한 국가가 복지국가를 원한다면 일단 해당 국가가 복지제도를 제대로 운용할 역량이 있나를 점검하고, 그게 증명된 후에도 시스템을 지속가능하고 부패/탈법행위로부터 자유롭고 복지정책이 모두를 포괄하도록 잘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국가는 그리스-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의 길을 밟을 것이다.

물론 한국은 복지국가를 한다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의 운명을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정치적 시스템은 미흡해도 이들 국가들보다는 확실히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보다는 확실히 뒤떨어지며, 프랑스보다도 조금 낮고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 국가는 그리스나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도한 공공지출, 방만한 복지운용, 경제활력 둔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이 만약 일찍이 복지국가화를 했다면 삶은 더 여유있을지 몰라도 이탈리아, 스페인 꼴이 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화의 우려는 괴담일지 몰라도 이탈리아, 스페인화의 우려는 제법 현실화 있는 경고인 셈이다.  

사실 위 인용문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구조적 결함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거기보다는 확실히 약하지만 한국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들이다. 과보호받는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 과도한 복지의 보편화로 인한 빈곤층에 대한 약한 사회보장성, 선진국치곤 약한 법치주의와 재산권 보장은 한국도 가진 문제다. 그렇기에 복지국가 역량 문제가 더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의 확실한 실패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진정한 복지국가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이런 문제를 점검하고 개혁해낸 이후에 복지국가화를 완료해야 한다.  


+ '한국은 국가의 복지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서 가족에 복지를 떠넘겼다'는 식의 주장이 보이는데, 위에 설명한 이유로 황당하게 느껴질 뿐이다. 선진국 인정받는 지금도 타 선진국에 비해 부실한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가졌는데, 생활수준도 낮고 정치 사회시스템이 더 엉망이었던 70-80년대에 복지국가화를 했다면 문자 그대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꼴 났다. 아니 거긴 옛날엔 한국보다 확실히 잘 살았으니 베네수엘라화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베네수엘라와 달리 석유는 없었으니 자원의존성의 관점에선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1. 일하나 은퇴해서 연금받으나 들어오는 월급이 똑같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2. https://anticap.wordpress.com/2014/04/05/chart-of-the-day-322/ [본문으로]
  3. 스위스나 한국 정도만 예외다. 그나마 이 둘은 세전 지니계수라도 낮다는 데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르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과거에 좌파 운동권들은 한국과 프랑스를 스펙트럼 속에서 양 극단에 놓고 둘을 비교했었다. 한국은 관용이 부족하지만 프랑스는 톨레랑스의 나라이며, 한국은 권위자들에 과도하게 순종적인 나라지만 프랑스는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엎어버리는 다혈질의 나라고, 등등...

하지만 2019년 시점에서 보니 편향된 견해였던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문화 시스템의 양상과 수준의 관점에서, 한국과 프랑스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나라니까. 


- 오랜 중앙집권의 역사와 여기에서 파생된 심각한 수도권-지방 격차.[각주:1]  

- 권위가 강한 카리스마형 지도자들의 연속. 한국의 대통령제와 프랑스의 '대통령제같은' 이원집정부제는 이를 뒷받침한다. 

- 엘리트집단의 강력함과 국가주의, 관치 성향이 강한 국가운영 

- 정치 시스템에 왕이 없으며 없어야만 한다는 강한 공화국적 인식. 

- 경직된 노동시장과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의 과보호

- 최근 비슷해진 1인당 GDP(특히 PPP 기준)와 세후소득 등의 경제지표

- 낮은 사회적 신뢰수준[각주:2]과 엘리트-비엘리트 간의 심각한 불신

- 선진국치곤 강한 민족주의와 자국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 집착[각주:3]

........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이미지와 실상의 괴리가 가장 큰 선진국은 프랑스라고 보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옛날보다 이미지가 많이 나빠졌던데, 환상이 오래 갈 수 없기는 하지. 

잘 봐 줘야 한국 상위호환 수준의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가진 나라를 치켜세웠으니. 


+ 참고로 여기서 비판받는 프랑스 시스템의 허술함은 역사적인 것으로, 무려 프랑스 혁명까지 이어진다. 

흔히 프랑스 혁명을 과정이 매우 폭력적이었으나, 그래도 구제도의 모순을 혁파하고 자유, 평등, 박애, 진보와 같은 근대성을 제도화한 위대한 정치혁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삐딱하게 보자하면 다른 시선도 가능하다. 구제도의 모순이 정변과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해결돼야만 했을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려면 과격함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국은 그러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을 통해 정치사회 시스템을 개선해나가는데 성공했으니까. 프랑스 혁명은 정치사회의 문제가 시스템 하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쌓이다가 터져버린 즉 기존 정치사회 시스템 수준의 허술함을 드러낸 사례이다. 프랑스 혁명의 의의는 물론 방대하나 이러한 측면을 잊으면 안 된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이 역사적 패턴과 고질병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노란 조끼 시위를 포함해 현대 프랑스에 만연한 폭력시위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서 과격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폭력시위가 답이 아니라는 것조차 모르는 바보라는 해석밖엔 나오지 않는다. 

  1. 인구집중은 한국이 프랑스보다 훨씬 심하지만, 대도시 간 인구비나 수도권-지방의 경제력/생활수준 격차 등으로 보면 한국과 프랑스가 비슷한 급이거나 프랑스가 한 수 위이다. [본문으로]
  2. 한국이 저신뢰사회라는 분석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내놓아 유명해졌는데, 그 책에선 프랑스도 한국과 같은 저신뢰사회로 분류됐다! [본문으로]
  3. 예전에 프랑스가 외래어를 죄다 프랑스어식으로 번안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자기 문화를 아낄 줄 안다고 좋게 봤었는데, 지금 보면 그저 국수주의적인 뻘짓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제목만 보면 한국인과 한국이 문제가 많았다고 (어글리 코리안, 해외진출한 한국기업의 횡포, 코피노 문제, 베트남에서의 전쟁범죄 등)생각하기 십상일 텐데, 내가 반한감정이 나올거라 생각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영향력을 많이 끼치기 때문에. 

한국제 상품, K-pop 등을 통해 한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많이 커졌다고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아진 듯 하다. 적어도 예전처럼 '외국인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남북한 구분 못 한다'는 식의 푸념은 많이 사라졌다. 근래의 한국 경제의 부진과 인구구조 문제를 생각하면 이 영향력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10년은 갈 것 같으니(설령 내부적으로 쇠퇴하더라도 외부에서 알아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한국의 영향력이 당분간은 유지될 거라 가정하자.

어느 나라든 유명해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당연하지만 반발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십상이다. 이유는 다양하더라도 실제로 이게 본격화되는 건 해당국이 세계적으로 커질 때다. 아랍/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반미감정, 한국과 중국의 반일감정, 몇몇 구 소련 국가의 반러감정, 좌파 반식민주의자들의 반미/프랑스/반영감정, 일본 극우들의 반한감정을 생각해 보자. 반감의 대상이 된 미국, 일본, 소련-러시아, 프랑스, 영국, 한국 모두 한때나마 전세계적인 무시못할 권력을 가진 국가들이다. 적어도 저런 감정이 거세지거나, 감정에 근거가 된 역사적인 경험이 있었을 땐 그랬다. 만약 이 국가들이 힘이 약했다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들 일이 있었을까? 존재감도 없고 직접적 피해(라 생각되는 일들)를 벌일 권력도 없으니 욕할 건덕지도 없을 텐데. 인기있는 연예인은 나라 전체에 온갖 가십거리가 되지만 일반인은 그러지 않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의 자국에 대한 반감을 무조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국이 세계적인 반감을 불러을으킬 존재감과 국력을 갖췄다는 방증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왜 자국이 전세계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나다. 좀 나눠서 생각해 보자면... 


1. 단순히 자국에 질투가 나거나 자국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건드려서 그럴 수도 있다. 인기있는 연예인들이 온갖 가십거리와 루머에 시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과거 한국 문화컨텐츠의 일본에 대한 열폭과 현재 일본 극우들의 한국에 대한 열폭이 이와 비슷하다. 

이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한 웃고 넘기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진지빨고 대응하면 서로의 감정만 상한다.  


2. 자국이 반감정이 있는 나라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도 있다. 예를 들어 K-pop이 남자들을 사나이답지 못하게 만든다/게이같이 만든다는 반감이 그 예다.[각주:1] 좀 옛날 일이지만, 미국이 포르노그래피를 통해 자국의 전통적 가치를 붕괴시키려 든다던 비서구의 선전선동도 비슷한 사례다. 

이것도 1과 비슷하다. 심각해지지만 않는다면 문화 차이로 보고 웃고 넘기자. 


3. 정말로 문제되는 영향력을 행사해서 생긴 반감정도 있다. 한국 기업들이 타국에서 가혹한 노동조건을 요구한다던가, 베트남전 참전 당시 한국군의 전쟁범죄가 있었다던가 하는 것들. 타국 사례를 들자면 미국이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만행을 방조한다며 반발하는 이슬람권의 태도나,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중국의 태도가 있다. 

진짜 심각하게 여겨져야 할 반한감정이다. 그나마 한국은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아니었고 국력의 부상은 최근이기 때문에 묻고 따질 만행들의 껀수가 적긴 하지만, 이 문제 해결에 실패한다면 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러시아, 일본이 가졌던 수준의 전세계적인 반감정에 맞닥드리게 가능성도 약하게나마 있다. 

물론 받아들이기 힘들고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은 동남아에서 고임금을 주는데도 동남아 현지 기업들은 책임에서 빠지고 자기만 욕 먹는다던가[각주:2], 무조건적인 인권 외교를 들먹여서 잠재력 있는 독재국가와의 교류 자체를 금기시하려 든다던가... 그 부분은 그냥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판을 한 귀로 흘리면 곤란하다. 최소한 문제 자체는 인정하고, 개선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보자. 큰 권한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제국을 경영한 경험이 없고,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쳐본 게 최근이었던 한국인들에게 세계적인 반한감정은 익숙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영향력이 많이 커진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위에서 길게 서술했듯 반한감정은 국력이 커진다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고. 그러니 우리는 반한감정에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계획해야 한다. 진정으로 책임감 있는 오래가는 강대국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1. 한국이 동성애자가 살기 좋은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은 다른 지역들처럼 '게이 같다고 여겨질' 스테레오타입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끼리 친하게 지낸다던가 꾸민다던가 하는 타 국가에선 게이같아보이는 행동도 한국인들 서슴지 않는다. [본문으로]
  2. 사실 저소득국에서 노동 착취를 자행한다면서 국제적으로 욕 먹는 대기업들은, 해당국가 기업에 비해 임금을 많이 주는 편이라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상대적 우위가 떨어지고, 공산주의 체제(구 소련, 마오쩌둥 당시의 중국 등), 권위주의 체제[각주:1](현 중국, 러시아 등)나 신정국가(이란, 사우디[각주:2] 등)같은 비서구의 대안'''으로 보이는''' 체제들이 매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현대문명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최고로 평가되는 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의무론적 이유 -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제일 좋은 체제이다. 

2. 공리주의적 이유 - 사회 안정[각주:3]과 경제적 번영[각주:4]에 있어 제일 좋은 체제이다.  

이 중에 비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실질적인 타격이 되는 건 2이다. 1과 같은 순수한 윤리학이야 뭐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겐 안 먹힐 것이고, '혼란스러운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존엄성이 약간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우겨서라도 면피할 수 있다. 국제정치에서 윤리는 공허한 외침으로 취급받을 때도 종종 있고. 

그러나 2는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다. 심지어 체제의 지도자들에게도. 자유민주주의의 공리주의적 유리함을 함부로 무시했다가는 경제 파탄이나 대중의 반발로 체제가 파탄날지도 모른다. 1과는 달리 확실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녔고, 그 영향력이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지도자들에게 향한다,  


실제로 2는 비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들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고, 수많은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실패했거나 부분적으로 자유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했다. 실제로 공산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시도했고(실패로 끝나 결국 소련은 무너졌지만), 헌법상 사회주의 체제인 국가들도[각주:5]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제적 개방을 감행했다. 

한국의 세 독재정권을 포함해, 세계의 수많은 권위주의 정부는 국민들의 반발로 붕괴로 끝났다. 

신정국가인 이란과 사우디도 국제 투자를 받아 현대화된 기술과 기업 단지를 도입하거나, 국제 표준과 여론에 맞게 신정체제 요소를 완화하는 등 부분적으로나마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승리는 과학기술로 끝이 날 수도 있는데, 최근에 나타났거나 등장할 걸로 예측되는 AI/자동화, 유전공학, 사이보그, 수명 연장[각주:6]과 같은 과학기술은 현대문명과 인간 본성의 기틀을 뒤바꿀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류는 사회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방향으로 인간이나 사회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기 위해 중국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해 쓴 을 다시 언급해 보겠다. 

개인적으로 2019년 현재 중국의 일당독재체제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낫다는 주장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적어도 이 체제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중국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여러 사회문제가 형성되고 있으며 시민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문제를 기존의 체제로는 감당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과학기술이 월등히 발달하면 안 통할 수도 있다. 

 중국은 AI를 통해 관치경제의 고질적 문제 즉 비효율과 부패로 경제성장을 제한하며 혁신을 억제한다는 단점을 없애버릴 수 있으며, 유전공학을 통해 독재 체제에서도 사회를 안정시킬 국민들이 형성될 수 있으며, 감시검열 기술을 통해 반란세력의 씨를 말리면 체제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사회 안정을 누릴 수 있다. 즉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성이 바뀌어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도 사회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생각해봐도 결론은 비슷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자유민주주의에 비해 열위에 있는 다른 정치 시스템들을 현실적이며 효율적인 체제로 만들어버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붕괴까진 아니더라도 자유나 인권을 약간이나마 침해하거나 증진을 방해할 과학기술은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인공자궁이 발달하면 여성의 출산으로 인한 커리어상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 여성 경력단절을 해결하려는데 여성들을 법이나 제도로 배려하기 싫어하는 몇몇 국가나 기업은 여성들에게 인공자궁 사용을 강제할 수 있다. 여성 권리 향상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과학기술이 악용되는 셈이다. 또 AI/자동화를 통해 노동력 수요가 줄어들 수 있는데, 그러면 저출산 고령화로 고생하는 나라들도 이민 유입을 할 필요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이민자들에게 경제적인 기회를 제공하길 원하는 이타주의자나, 자국이 타국이나 타 문화에 포용적이기 바라는 탈민족/다문화주의자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따라서 21세기의 과학기술은 자유민주주의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아도 사회가 괜찮게 굴러간다면, 왜 굳이 자유민주주의를 따라야 하는가? 과거엔 인류를 위하여 체제를 개조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과학기술이 특이점 수준으로 발달하면 체제를 위해 사람들을 개조하는 방법도 생기게 된다. 여기서 후자를 선택하지 말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비자유민주주의엔 여전히 1의 문제는 남지만, 이는 가치관 자체가 다른 인간들에겐 안 먹힐 수도 있다.  


이런 세계관이 디스토피아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게 21세기의 잠재적인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인지하고 맞서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일단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비슷한 발상을 한 것 같긴 한데... 그나마 목소리 높이는 사람도 과학기술이 독재체제를 정당화할지 모른다 정도로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심각해질 수 있는 문제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공산주의 체제는 거의 예외 없이 권위주의 체제였지만, 공산주의적이지 않으면서 권위주의 체제인 나라들도 많으므로 별도로 표시했다. [본문으로]
  2. 사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신정국가라 하기 애매하다. 사우디는 태초부터 종교집단인 와하비스트들과 정치집단인 사우드 가의 합작으로 이뤄낸 나라라, 지배자인 사우드 왕가 자체는 종교가문이 아니다. 그러나 왕가 자체는 와하비스트들의 영항력을 크게 용인하고 있고, 법과 체제에 있어 종교적 영향력이 매우 크므로 사우디를 편의상 신정국가로 분류했다. [본문으로]
  3. 무분별하게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할 경우, 정치적 반란세력만 키워서 대규모 시위나 내전과 같은 소요사태를 이끌 수 있다. [본문으로]
  4. 믿기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국가들의 결과적인 실패를 보라. [본문으로]
  5. 중국, 베트남, 라오스, 북한, 쿠바 등. [본문으로]
  6. 120살을 넘어, 300살/500살 심지어 영생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로선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 현재 과학기술 발달의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되더라도 놀랄 게 없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현재를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시대로 보는 사람이 많다. 중국이 많이 성장하다 보니,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중 간 불안감은 상존했는데, 반중 공약을 내세운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직접적으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패권을 차지할 수 없을 거라는 의견이 많이 보인다.  중진국 함정의 위험성, 지리적 제약, 과도한 부채성장, 관치경제의 한계, 일당 독재의 한계, 소프트파워의 부재, 인구구조 문제, 동맹국의 부실함 등 중국의 고질적 문제 떄문이다.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중국이 패권국이 될 하나의 확실한 시나리오가 있다면 어떨까. 바로 세계 최초로 과학기술을 기술적 특이점 수준으로 극도로 발전시키는 시나리오다. 

중국은 선진국은 아니지만 세계 2위의 국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투자가 가능하므로,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 역량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적어도 양적인 면에선 여러 분야에서 세계 1위이며, 질적으로는 아직 세계 최강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부가 잘만 하면 추월도 가능하다. 따라서 중국이 과학기술 발달의 승리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타국에 대해 기술적 우위를 누릴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중국의 고질적 문제들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중국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만 들어보자. 

1. AI와 자동화

- 인간의 일자리를 줄이거나 아예 완전 대체할 수도 있는데, 미래에 인구구조 문제로 고통받을 중국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 고도로 발달한 AI를 정치에 활용하면, 중국은 관치경제를 유지하면서도 관치 특유의 비효율성과 부패 문제를 개선해 추가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부가 모든 경제현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경우, 냉전식 사회주의도 더 이상 공상이 아니게 될 수 있다. 과거에 실패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적 요소 없이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2. 유전공학

-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수한 성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정부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우수한' 후손들을 낳게 할 것이고, 그러면 '양'적인 인구구조 문제를 개개인의 '질'적 향상으로써 돌파할 수 있다. 

- 유전자 조작을 통해 독재정권 및 사회 유지에 방해가 되는 '반사회성', '과격함', '도전성' 등의 성질을 약화시킨 후손들을 만들 수 있다. 

- 노화 방지 기술을 통해 노화를 늦춘다면 은퇴 연령을 늦출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인구절벽을 막고 연금 붕괴를 피할 수 있다. 

- 또한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 본성을 사회주의에 맞게 바꾸면, AI와 함께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는 데서 더 보람을 느끼는 인류를 만든다던가,  

3. 정보통신

- 정보통신의 발달로 정부의 완벽한 검열 및 도청이 가능해지면, 중국인 개개인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되겠지만,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성공이다. 이건 CCTV/얼굴 인식/황금방패 등을 통해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 사례들을 읽고 소름끼칠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인간성을 바꿔서 국가와 지배계층에 유리하도록 하자는 발상은 거부감이 강하게 드는 게 당연하므로. 

이것이 내가 중국의 과학기술을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단언컨대 한국과 미국, 스웨덴, 독일 같은 나라는 절대 이렇게 못 한다. 하더라도 시행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원칙을 중시하는 데다, 시민사회가 발달했기 때문에 이런 중대한 문제를 정부가 밀실에서 얼렁뚱땅 넘길 수 없다. 다양한 시민집단들이 논의에 참여해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신중하게 결론지을 것이므로. 

하지만 중국은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밀실로 결정해서 명령하면 그만이므로, 이런 소름끼치는 발상을 손쉽고 빠르게 정당화하고 강제할 수 있다. 따라서 설령 중국이 과학기술 발전이 좀 늦더라도, 타국이 중국과의 교류를 막지 않는다면 중국은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기술을 현장에 바로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술은 디스토피아적인 발상과는 별개로 어마어마하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했다가, 복종만 하기 때문에 일체의 이견이나 창의성이 없는 기계같은 인류를 만들어버려 기업가정신이나 문화적 다양성이 완전히 죽어버릴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유로 위험성은 언급조차 안 되거나 무시될 가능성도 있다. 정말 그렇게 되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중국과 중국인들에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이렇게 패권을 장악한다면, 한국도 울며 겨자먹기로 중국의 과학기술들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반영구적으로 패할 것이므로. 이런 시나리오는 매우 위험한데, 과학기술의 장단점을 제대로 논의해보지도 못하고 떠밀려서 서둘러 도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의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 과학기술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도 고생하게 될 것이고. 


중국이 미래에 이 시나리오대로 움직일까. 미래 예측은 전문가도 자주 틀리는 분야인 데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므로 확답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유력한 시나리오 중 하나 정도는 될 것임은 분명하다. 중국 바로 동쪽에 있으며 여러 산업 분야에서 중국과 경쟁하는 한국 시민으로서, 이 시나리오를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 보고 대비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올 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Posted by 유월비상
,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한국사회를 총체적인 저신뢰 사회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 평가는 각 국가들의 스스로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절대적이고 객관적 기준에 근거한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저신뢰 사회가 맞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 진정 저신뢰 사회였고 지금도 저신뢰 사회라면, 지난 반세기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이 가능 했을지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도 한국사회의 일상에서는 암묵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비계약적이고 비법률적인 관행들이 만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계약서나 약관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보다는 구두 약속이나 모호한 무한책임을 근거로 한 업무처리가 흔하다. 이러한 일상의 행위들은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일어나기 힘든 것들이다. 라서 한국사회의 저신뢰 평가는 실제 한국사회에서의 신뢰의 부재와 더불어, 주관적인 인식의 왜곡에 최소한 일부 귀인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문화 역사적으로 유교적인 가치를 근간으로 한 국가와 사회체계를 운영해왔기에 국가, 사회, 기업을 하나의 큰 가족과 같은 집단으로 인식하는 가족확장성(Korean Family Expansionism)[각주:1]을 심리적 특성으로 발전시켜왔다. 이에 따라 한국 사람들은 정부, 회사 등 사회적 체계들을 가족의 속성으로 인식하고, 그런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사회적 체계에 가족과 같은 높은 신뢰를 요구하고 있을 수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오히려 거대한 가족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한국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정부, 사회, 기업과 같은 사회적 조직은 더 이상 한국 사람들의 높은 신뢰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그에 대한 불신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을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신뢰의 기준과 실제 신뢰 수준 간의 관계, 그리고 가족확장성이라는 문화심리적 요인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중략)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저(低)신뢰사회’로 평가된다. 2011년 OECD에서 발간된 보고서인 <How's Life?: Measuring Well-being 2011>에 따르면 일반적인 타인들에 대한 신뢰 수준 조사 결과, 한국은 조사대상국 36개국 중 20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OECD 평균보다 낮은 수치였다. 사법부, 정부, 그리고 언론에 대한 신뢰 수준에 대해서는 조사대상국 40 개국 가운데 각각 34위, 31위, 38위를 기록하였다. OECD에서 발간된 또 다른 보고서 <Government at a Glance 2013>에서는 한국인 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불과 25%에 불과했는데, 이는 조사대상국 34개국 가운데 29위에 해당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결과들은 활용한 문항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조사의 효율성을 위해 단일 문항으로 묻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균관대 학교 서베이리서치센터의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서는 매년 기업, 언론, 정부, 국회, 학계, 시민단체 등의 주요 기관, 그리고 사회 전반 에 대한 신뢰 수준을 측정하는데 해당 조사 역시 단일 문항을 활용, 단지 각 대상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리커트 3점 척도 상에서 응답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조사는 효율성과 현실성을 고려한 것이지만 그 신뢰성 과 타당성의 측면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신뢰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합의된 학술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른 정교한 척도가 구성되어 있지 않기에, 기존 신뢰에 관한 조사결과는 학술적 엄격성에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최상진 등(2013)은 한국에서의 신뢰 개념과 서구에서의 신뢰 개념을 비교, 양자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국에서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 등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과의 특수한 관계들 속에서 신뢰가 형성되는 데 반해, 서구에서는 비교적 넓은 범위의, 일반적인 대인 관계나 공적인 관계 내에서도 신뢰가 폭넓게 형성되고, 규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또한 한국 사람들은 상호 간 특별하고,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신뢰가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여기지만, 서구에서는 상대방이 지닌 속성이나 행위 등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및 검증이 완료되고, 상대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수반 되어야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한성열(2005)은 한국 사회에서의 신뢰란 가족을 기반으로 하여 1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가족을 넘어선 다른 일반적인 대상들에 대한 신뢰 역시 가족을 향한 한국 사람들의 신뢰를 고려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Kim(2003) 역시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속성에 근거하여, 타인과의 신뢰를 구성한다기보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맺어진 관계 그 자체로부터 신뢰감을 느낀다고 주장 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부나 기업 등에 대한 신뢰는 해당 기관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얼마나 관련이 있다고 지각하는지 여부에 따라 신뢰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더해, 신뢰에 대한 기존 조사들은 참조 집단 효과(Reference Group Effect)라는 비교 문화조사에서의 중요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Heine, Lehman, Peng과 Greenholtz(2002)는 주관적인 리커트 척도를 활용하여 비교문화 연구를 진행할 경우, 참조 집단 효과가 발생하여 연구 결과가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태도, 가치관 등에 대한 자기보고식 문항들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각각 참조 집단으로 삼는다(Peng, Nisbett, & Wong, 1997). 예를 들어, 한국인은 한국인들을 참조 집단으로 삼아 자신의 태도, 가치관의 상대적 크기를 추정하며, 미국인은 자신이 속 한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을 참고 집단으로 삼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교문화 연구에서 각 문화권 실험 참여자들의 참조 집단이 서로 상이하다면, 측정된 리커트 척도 점수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왜냐하면 참조 집단, 즉 측정치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데 활용되는 기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에 대한 국제 통계 조사 결과들 역시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 부재한 채,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리커트 응답값만을 단순 비교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한국인들의 신뢰 인식이 다른 국가들에서 보고된 신뢰 인식보다 더 떨어진다고 단순히 판단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인식 조사로 나타난 사회적 진단은 그 결과해석에 유의하여야 하며, 그 인식형성에서 사용된 참조 집단 또는 비교기준을 조사하는 학술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중략)


 본 연구에서는 부모,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 기준을 각각 확인하고, 대상들에 대한 신뢰 기준들의 차이가 실제 신뢰 수준 및 가족확장성 수준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특히 추가적 으로 가족확장성의 역할을 실험적으로 검증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사법부, 정치인, 정부 등에 대해 자신의 부모와 유사 하거나 혹은 더 높은 수준의 신뢰 기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은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보다 높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 기준과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신뢰 기준 내 관계 요인에 있어서는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 보다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더 낮았지만 신뢰 기준 내 대상 요인에 있어서는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보다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더 높았다. 
 둘째,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높을수록 각 대상에 대한 실제 신뢰 수준은 낮았다. 히 부모에 비해 사법부,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의 기준을 갖고 있을수록 이들 대상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정부, 기업 등 다양한 사회 조직들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 체계로 이해하려는 성향인 ‘가족확장성’ 수준이 높을수록, 부모보다는 사법부와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 기준을 나타냈다. 그리고 가족확장성 수준이 높을수 록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상대적 신뢰 수준 (부모 대비) 또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통해 가족확장성의 수준을 조작한 후, 집단 간 부모-정부에 대한 상대적 신뢰 기준 간 차이가 유의미한지를 확인한 결과, 가족확장성이 높은 집단은 가족확장성이 낮은 집단에 비해 부모-정부 간 상대적 신뢰 기준 간 차이가 유의미하게 적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선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해 부모에 준하거나, 심지어 부모보다 더 높은 신뢰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본 연구의 결과는 한국인들의 신뢰 인식에 관한 기존 문화심리학적 연구들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가족이나 친구 등 친밀한 관계를 토대로 신뢰감 및 신뢰의 기준을 형성하며, 이렇게 획득된 신뢰 인식은 사회 제도나 정부, 기업, 언론, 사법부 등 비교적 거시적인 사회 조직들에 대한 신뢰감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박영신, 김의철, 2005; 최상진 등, 2003; 한성열, 2005). 그리고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 기준을 가지고 있을수록 실제 각 대상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았다는 본 연구의 결과는, 한국 사회 내 ‘저신뢰’ 현상에서 여타 국가의 국민들보다 한국인들이 사법부와 정치인에 대해 더 높게 가지고 있는 신뢰 기준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 한다면, 현재 OECD 등에서 보고된 국가 간 신뢰 인식 상의 비교 결과들을 토대로 성급하게 한국 사회를 ‘저신뢰 사회’로 규정짓기는 어려운 일이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각 국가별 정부, 기업, 사법부, 정치인 등 주체들에 대한 신뢰 인식 상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거나, 혹은 고유한 신뢰의 기준들을 규명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상대적 신뢰 기준(부모 대비)은 가족확장성과 유의미한 정적 상관을 나타냈다. 즉, 가족확장성이 높을 수록 한국인들은 사법부, 정치인에 대해 부모에 준하거나, 심지어 부모보다 더 높은 신뢰 기준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가족확장성을 높게 가지고 있던 이들일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 기준이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에 보다 가까워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집단주의적 역사, 가족을 중시하던 유교적 가치의 지속 등에 따라 한국인들이 지니게 된 가족확장성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성향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저신뢰 현상에 대한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허용회, 박선웅, 허태균 (2017). 「저신뢰 사회를 만드는 고신뢰 기대? 가족확장성과 신뢰기준의 역할」.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 23(1), p. 75-96


 흔히 한국의 저신뢰를 분석한 글들은 저신뢰 현상을 역사적 혼란, 부정부패, 양극화 등 부정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 반응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인으로 하여금 저신뢰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 '신뢰'의 주관적 정의와 기준 그 자체를 분석한 글은 처음 본다. 독특한 해석이라 가져왔다.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라 이 논문이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 편이다. 신뢰라는 개념과 신뢰할 만하다는 심리적 판단 자체가 주관적인데, 어떻게 단순한 신뢰도 수치만 가지고 저신뢰다, 고신뢰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싶었다. 국가별, 문화권별 인식 차이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읽으면서 마음이 다 후련해지네. 

 내가 국뽕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한국이 콜롬비아 같은 나라랑 사회신뢰도가 동급이거나 낮다는 식의 연구결과를 보면 '아니 한국이 그렇게 개허접한 국가였던가?' 하는 의문이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왔다. 그걸 가지고 '한국 사회 수준은 콜롬비아급!'과 같은 식의 결론이 나오면 더더욱. 

  1. 가족확장성이란 지역사회, 기업, 정부, 언론 등 거시적인 사회 체계들을 곧 가족 체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가족 확장성이 높은 이들은 사회 내 조직들의 형태 가 운영 방식이 곧 가족의 형태 및 운영 방식 과 유사해야 한다고 여긴다. 또한 기업가-종업원, 대통령-국민 등의 관계를 곧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기업가나 대통령 등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아랫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 논문 안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

1. 난민 발생국의 인권 탄압을 결과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인종, 국적, 종교, 정치 등 정체성으로 인한 억압과 차별이 난민 신청의 합법적 사유가 된다면, 난민 발생국 정부는 "꼬우면 난민 되서 나라를 떠라"라는 식으로 특정 집단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탄압하는 건 정부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민을 아예 안 받아준다면 탄압당하는 집단이 집단적인 저항을 하는 등 정부도 무시 못하게 만들 방법이 얼마든지 있고, 탄압 문제를 강제로 해결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난민 선택지가 있는 이상 편하게 나라를 뜰 사람이 많고 정부도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원할 것이다. 그리고 난민 발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해결되지 않겠지.


2. 인재 유출은 난민 발생국의 장기적 존속을 위협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타국 난민을 받아들이는 건 해당국의 인구를 줄이고 고급 인재를 유출시킨다. 난민이 발생할 수준의 국가는 인적자원이 이미 열악한 경우가 많아, 향후 국가 재건 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권 탄압을 자행하는 나라가 이 문제로 고통받는 건 자업자득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한동안 이 문제로 고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게 옳은 일일까?   

한 예로, 2010년대 지구촌 최악의 비극인 시리아 내전은 인구 1/4을 해외로 유출시켰고, 이들 중엔 중산층이나 고급 인력들이 많다. 그들이 내전 종식되고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향후 시리아 재건에 장애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만약 한국전쟁 때 한국 난민이 1/4, 즉 500만명 발생해 그만큼이 타국으로 빠져나갔다면 한국이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한국전쟁 난민 절대다수는 국내 이동이었다. 중북부 지방에서 부산 피난촌까지 가는 식으로. 


3. 국제사회에서 난민이 무기화될 수 있다. 

국가는 타국 난민을 수용하는 대신 국제사회에 여러 조건을 내걸고 '안 지키면 난민을 당신 국가로 보내겠다'며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또 다른 나라로 대규모 난민을 유인하거나, 정보전을 통해 타국의 난민과 자국민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등 타국의 사회 혼란을 유도할 여지가 있다.

실제로 시리아 난민 사태 속에서 터키와 러시아가 유럽에 이런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이렇게 난민 제도의 본래 취지를 악용하고 훼손하는 악행들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타국의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이유야 많이 언급된 듯 한데, 난민 제도 자체의 문제나 결함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어서 여기에 써본다.  

Posted by 유월비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