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 「창비어린이」, 2019년 봄호, p.27-36.

아쉽게도 인터넷에선 볼 수 없으니 직접 사거나 도서관에서 읽는 방법밖엔 없다. 


나도 트위터에서 알게 된 글인데, 진짜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욕 한 게 아니다. 진짜로 문장 하나하나가 명문이다. 보면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이 사회는 OO 혐오가 심각하며 규제되어야 한다"는 신좌파식 진부한 레토릭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각주:1] 그는 흔한 먹물좌파식 이론으로 글을 쓰기 보다는 자신의 특수한 처지가 바탕이 된 아동과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아동혐오 현상을 '이미지 시대'라는 특이한, 신좌파들 이론보단 훨씬 맞아떨어지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흔해빠진 선악구도가 없는 건 덤이다. 

신좌파식 레토릭에 학을 뗀 나에게 단비같은 반가운 글이다. 신좌파에 반대한다면서 지금까지 이런 발상을 못했을까...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으니.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흥미로웠던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1. 장애인의 입장에서 본 아동[각주:2]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아동기였다. 내가 어린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주로 만나 교류해야 할 동료들이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피부색, 신체, 정신 구조를 가진 존재와 함께 있을 때, 어린이는 결코 아무 획책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어린이는 또래들 사이에서 놀림과 배척의 대상이다. 장애 아동은 또래가 아니라 성인과 있을 때 훨씬 행복하다.

 아동은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동료 시민이다. 길에서 만난 어린이들은 부모 손에 이끌려 곁을 지나쳐도 시야에서 내 휠체어가 사라질 때까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몸을 비튼다. 먼 거리에서도 놓치지 않는다. "와, 장애인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다른 신체를 가진 존재를 처음 마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이해하지만, 적응하기 쉽지 않다. 멀리서 아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급적 마주치기를 피해 길을 돌아간다.

 그런데 사실 어린이가 나를 보고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데에는, 내가 어린이에게서 몸을 피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가 놓여 있다. 그 아이들이 태어난 동네나 다니는 학교에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인권 교육이나 영상을 통해 장애인의 이미지를 만나기 때문이다. 아예 이미지를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면, 아이는 나를 '장애인'이라고 특정하게 지칭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장애인과 어린이가 욕망을 가지고 부딪치고, 소란을 피우고, 진로에 방해가 되더라도 몸과 몸으로 더 자주 만나는 순간들을 상상하며 이 글을 쓰기로 한다. 소비자인 어른에게 '육성되는' 아동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른과 함께 자라는 아동을 떠올린다. 나를 보고는 "와, 장애인이다!"고 외치면서 부모에게 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에 대해 자신의 궁금증을 자기 입으로 질문하는 아이를 상상한다.

같은 책, p.27-29.

  흔히 아동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혐오에 대한 반동으로 "아동보단 개저씨가 더 위험하지 않냐?"는 식으로 아동의 잠재적인 부정적 요인들을 무조건 실드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동들이 장애인에게 보이는 철없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동은 순수무결한 선한 피해자가 아니라, 소수자이면서도 동시에 성장기에 있는 존재로서 서투르고 답답한 존재다. 나는 그의 시선에 동의하며, 소수자에도 어둡고 음침한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소수자의 진정한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아동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존재로 존중하려 시도한다. 아동들이 저러는 게 장애인을 교육이나 영상 같은 이미지로만 접했기 때문이라면서 이해하려 시도한다. 난 이 구절에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며 믿음직스럽다고 느꼈다. 장애인으로서 아동들 때문에 힘든 일 많았을 텐데, 저런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건 어지간한 인품으론 못 할 짓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각주:3]을 핑계로 한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귀감이 되기 좋은 인물이다. 

 

2. 이미지만 남은 소수자들

 아이를 양육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가치를 띠며 국가와 시장도 (최소한 규범적, 형식적으로는) 양육을 지원하고 배려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국가는 공적인 주체로서 아동을 보호하고 돌보며, 사회 구성원들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학대 및 성범죄 등이 알려질 때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동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동 혐오라는 현상을 아동에 대한 물리적 학대로만 이해한다면, 현대 사회의 특징인 아동 배제 기제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아동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하고 그에 열광하면서도, 그 속성을 벗어난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떨까? 국가 단위에서 그 속성이란 사회, 경제적 재생산의 상징, 미래의 인적 자원이자 소비자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 일반에게는, 바로 '귀여움'이다. 아동의 귀여움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에 머물지 않고 전국 단위의 '공적인 것'으로 소비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정반대로 '귀엽지 않은 아동'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동은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울고, 소란을 일으키고, 먹고, 싸고, 부수는 생명이다. 

(중략)

 '프린세스 메이커'나 유튜브, TV에서 하루하루 귀여움을 더해 가며 성장하는 아이를 지켜볼 때와는 달리, 정말로 한 생명을 돌보고, 같이 살아가며, 성장에 함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모든 동물은 생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 부모에 의해서도 쉽게 통제되지 않고,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시끄럽게 소음을 내며 운다. 아동은 (이미지로 등장할 때와 달리) 아무런 위협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바이러스와 세균을 지닌 인간이고, 먹고 배설하고, 피와 땀을 가진 '축축한' 존재다.

 현대 사회의 공적 공간은 점차 이러한 '축축한' 존재들을 추방시키고 있다. 장애인과 빈자, 특정 인종의 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공적 공간에서 손쉽게 추방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아동이 그 차례를 맞았다. 아동들은 더 이상 어른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은 어떤가? 노인들은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 기초 규범을 지키지 않는 존재로 지목되면서 젊은이들에게 혐오받는 대상이 되었다. 공적 공간은 점점 젊고, 건강하고, 세련된 행위 규범을 익한 존재들만의 세계가 되어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로서의' 소수자들이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비교적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다. 아동 유튜버들의 인기와 노키즈존의 병존은, 이처럼 이미지는 있되 물적 존재로의 몸은 마주치기 어려운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책, p.31-34.

보면서 감탄만 나오는 명문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단은 보면서 머리를 두들겨맞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현대 사회의 분노와 혐오, 정치적 올바름 등등 소수자 이슈 전반을 잘 요약해준 명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현실을 적확하게 설명한 글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요즘 사회풍조가 너무 윤리적 결벽증에 빠진 건 아닌가 싶었던 나로선, 윤리적 결벽증이 이런 현상을 낳지 않았나 가설을 세워본다. 이건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글을 따로 써야겠다. 



+ 이 저자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고, 소수자의 존엄성을 담담하게 옹호하는 책도 썼다. 칼럼 보고 믿음이 생겨서 사 봤다. 서평도 곧 올려야겠다. 

  1. 특집으로 같이 기고된 나머지 글들은 죄다 그런 레토릭이었다. [본문으로]
  2. 저자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을 받은 장애인이다. [본문으로]
  3. 냄새 난다, 잠재적 범죄자다, 이기적이다 등등...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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