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구의 인종주의자들과 달리, 한국인 인종주의자는 진지하게 자기 인종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음. 1
미국, 캐나다, 호주, 서북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진지하게 자기 민족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자기들이 제일 잘 살고, 세계에 '진보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전파하는 게 사실이니까.
자기 민족이 최고라는 사고가 올바른지는 둘째치고, 충분히 그런 주장이 말 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백인우월주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한국은 우월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인 인종주의자들은 한국인이 최고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수사이거나, 한국인에게는 한국적인 것이 최고라는 신토불이 정신 혹은 북한과 자주통일을 이루자는 민족주의적 수사에 불과하다. 한국인이 백인, 일본인보다 우월하다는 글이 적게나마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도 진지하게 한국인이 최고 우등 인종이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한국이 저들보다 뒤쳐졌어도 이런 면에선 낫다는 일종의 정신승리적인, 열등감의 발로일 뿐이다.
한국은 일제통치와 분단, 6.25 전쟁으로 극도로 빈곤해지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과거가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은 미국, 일본을 롤모델로 삼고 배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서구, 일본의 것=우월한 것이며 백인, 일본인=우월한 인종이라는 도식이 생겨났다. 그렇게 한국인은 백인, 일본인보다 아래니, 한국인은 그들의 위대한 문물과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상이 도출된다. 한국인이 자랑스러운 인종이긴 하지만 백인, 일본인만한 존재는 아닌 셈이다.
현재 한국은 서구와 일본의 수준을 많이 따라잡았지만,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했으며 과거에 생긴 가치관은 관성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인종주의자조차 대놓고 자기가 백인, 일본인보다 우위라고 생각하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선진성을 본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2. 한국인은 국가위상이 올라가면서 인종차별의 절대적 피해자에서 절대적 가해자 쪽으로 빠르게 전이 중.
이건 한국 인종차별이 타국보다 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3.에서 보듯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에서도 말했듯 한국이 많이 발전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종차별을 할 수 있는 권력/위치에 올라섰다는 뜻이다.
나는 신좌파들의 무조건적인 구조 타령에 신물 난 지 오래지만, 인종차별에 구조적인 요소가 크게 작동한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인종차별은 구조상 갑인 사람이 저지르기 쉽다. 쉽게 말해서, 고용주 한국인이 노동자 중국인에게 "짱깨"라 부르기가 노동자 한국인이 고용주 중국인에게 짱깨라 부르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 짓을 해도 잃는 게 더 적으니까. 물론 나는 후자의 시나리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그 점에서 나는 신좌파들과 일부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빈도가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과 일본 정부에게, 해방 이후 미국과 독일에 이민갔을 땐 백인과 해당국 정부에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이는 과거 한국의 신문/문학작품에 많이 나타나 있다. 당시 한국인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빈번했다.
그러나 한국은 생활수준이 많이 올라가 굳이 그 고생을 해가며 백인/일본인 밑에서 일할 일은 많이 줄었다. 대신 한국이 해외에서 중국인(조선족 포함), 동남아 외노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들을 차별하는 케이스는 많이 늘어났다. 이제 한국인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극우정당의 존재나 혐오범죄같은 극단적인 수준의 인종차별은 적지만, 그보다 덜한 수준의 차별과 혐오는 심각함.
전자는 현재 서구사회 상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국은 갱단 문화, 폭력 시위, 마약 유행 현상이 적은데서 볼 수 있듯 문화가 온건하다보니, 인종주의적 사고가 혐오범죄까지 가는 일은 별로 없다. 또 극우정당이 득세할 정도로 외국인 비중이 높지도 않고.
후자는, 외국인 비하발언에 대한 터부가 서구보다 약한 데서 볼 수 있다. 한국에선 되놈, 짱깨라는 비하어를 대놓고 말하는 경우가 흔한데, 적어도 서구사회에선 공적으로는 그런 발언을 했다간 100% 징계감이다. 흑형처럼 '비하표현까진 아니지만 해당인이 불편하게 여길만한 표현'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고.
아마 한국인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같은 인종주의 비판 담론이 학계든 언론이든 뜸한 편이라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한국인이 인종차별의 가해자가 된 역사가 짧기도 하고. 그리고 곧 언급할 4.의 요소도 있다.
4. 한국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과거사와 국가분쟁으로 타국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경우가 빈번한데 그게 해당 국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사고까지 번지는 경우가 흔하다.
중국의 미세먼지, 중화패권주의로 인한 반감이 "착짱죽짱"같은 표현으로 번지고, 일본에 대한 역사적 악감정으로 일본 지진 피해자에게 "쪽바리들 잘 죽었다!"고 악플 다는 거에서 볼 수 있다. 2
서구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서구 선진국 중 이스라엘 정도를 제외하면 동북아시아나 그 이상 급의 화약고에 위치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 간 대립이나 분쟁은 거기에도 있지만, 그래도 한국-북한, 한국-일본, 한국-중국 급의 수준은 아니다. 프랑스-독일 간의 라이벌 감정이 심하다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가 상당수 해결되었으며, 두 국가 모두 한국급의 군사무장을 하지도 않으며, 문제 많다지만 형식적으로나마 EU에서 같이 활동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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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국의 인종주의는 서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
최근 신좌파 계열이 유행하면서 한국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대한 담론이 늘어난 느낌인데, 다 좋지만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땐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좀 많이 감안했으면 좋겠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때 "한국 학계의 서구의존성"을 성토하는 담론이 많이 나왔었다. 개인적으로는 많이 회의적이지만, 인종차별 같은 문제는 확실한 '탈-서구의존적인' 분석이 필요할 때이다.
좋든 싫든 간에 한국은 서구와는 다른 환경과 역사를 가져온 사회인데, 인종차별 문제는 그게 강하게 드러나니까.
또 무조건적인 강자-약자 도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강자와 약자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며, 약자라 해서 아무 언행이나 강자에게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모든 윤리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윤리는 보편적이다.
백인/일본인이 한국인보다 강자라는 이유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쪽바리"라 부르고, 백인들더러 "한국 여자들과 섹스하려 안달 난 양키들"이라 부르는 게 정당화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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