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체능이 폐쇄적이라는 수준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 폐쇄적인 이유를 포함해서 부조리 문제를 자세히 써보자면.
1. 예술처럼 정답이 없거나 체육처럼 신체를 이용하는 예체능 특성상, 누구나 똑같이 가르칠 수 있는 보편적인 커리큘럼을 만들기 어렵다. 코치만의 독특한 철학, 노하우와 기술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한 도제식 교육으로 갈 수밖에 없다.
=> 클래식 애호가로서 말하자면, OOO 귀국 독주회 같은 데 가서 연주자 프로필 보면 'OO으로부터 사사받았다'는 말이 반드시 나온다. 이런 프로필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비판 이전에, 선생 한 명 한 명이 예술가에게 굉장히 중요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프로가 되기 위해 스승에 의존하는 구조에선 스승이 제자를 통제하고 갑질을 부려대는 현상이 발생하기 쉽다. 물론 세상엔 좋은 스승도 많지만, 스승이 대놓고 나쁜 짓을 시도했을 때 막기가 참 어려운 구조다. 특히 법적이나 사회적인 제재 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더 그렇다.
2. 집단 활동이 필수적인 예체능 분과가 많다보니, 집단을 규율할 수단이 필요하다.
=> 문제는 이런 통제 시도가 손쉽게 갑질, 똥군기, 가혹행위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거다. 한국의 군대문화나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 특성상 그런 잠재력이 충분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수영 강습을 받은 적 있었는데, 하루는 한 강사가 수영장 반대편에서 무슨 일인지 수강생들을 야단치고, 수강생 한 명 한 명씩 엉덩이에 수영용 킥보드를 날려서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저들은 왜 이런 데서까지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을까? 다른 사람들 다 노는 수영장이라 저들이 수영 선수들도 아닐 것이다. 평범한 수강생들에게도 저랬으니 수영 선수들에겐 오죽할까.
3. 진로를 상대적으로 어릴 때 정하고, 오로지 예체능에만 전념하다보니, 예체능계를 떠나면 먹고살 길이 없다.
=> 그러다보니 스승이 성폭력을 저질러도 굶어죽지 않으려면 참을 수밖에 없다. 오랜 연습이 필요한 예체능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는데, 엘리트교육은 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4. 종사자가 적은 예체능 분과가 많고, 이 경우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아 '카르텔'이 형성된다. 이는 1.에 의해 더 심해진다.
=> 부조리에 항의하거나 내부고발을 하여 구성원 누군가에게 '찍히게' 되면, 바로 그 집단에서 왕따가 되고 만다.
심석희가 조재범을 고발했다는 뉴스 보고 생각나서 써 봤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옴부즈만이나 신문고 제도를 운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체능계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도제식 제도를 없애거나 집단생활을 제한한다면 자칫 예체능 활동의 기반을 파괴할 수도 있다. 집단 구성원이 적다고 규제할 수도 없고, 엘리트체육 폐지하는 것도 부작용이 있고....
+ 대학원생 인권 문제와도 겹치는 사항이 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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