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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11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대한 아쉬움 6
사실 난 낙태죄가 폐지되는 변화는 환영한다. 낙태를 처벌해야 할 윤리적인 당위성도 잘 봐줘야 애매한 수준이고, 법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라 뒤에선 연간 수십만건의 낙태가 벌어지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죄를 존치하거나 더 나아가 낙태죄 집행을 확실히 하자는 건 도덕적 만족감을 명분으로 뒷감당 못 할 짓을 벌이는 거다. 차라리 낙태를 양성화해 여성들이 보다 안전하게 낙태를 받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다만 낙태죄가 폐지되는 과정은 다분히 아쉽다.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충분히 되어 낙태죄 폐지 여론이 굳어지면서 국민이 선출한 국회/정부가 이에 부응했다기보단,  비선출직인 헌재 재판관들이 순수한 법논리의 곡예를 통해 결정한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여론이 낙태죄에 갈수록 우호적으로 변하니 헌재가 국민 여론도 감안해서 판결했겠지만, 이런 식의 결정은 낙태 반대론자에게 쓸데없는 반발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물론 민의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공론장과 국회 정부는 무관심의 손놓는데 관료조직에 가까운 사법기관만 일하는 건 일종의 기술독재적 현상이다. 자칫 전문관료가 대중, 정부, 국회와 괴리되어 국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엔 낙태죄와 관련된 논의가 놀랄 정도로 적었다. 이는 국가별 낙태죄와 낙태 찬반 논란 현황을 비교해본 한 논문의 실제 결론이다. 적어도 서구 선진국들은 낙태 논의가 굉장히 치열했다. 수많은 찬반 논거와 학술연구가 나왔으며 정치권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고 대중토론에서도 엄청나게 나온 단골메뉴다. 낙태죄 폐지는 그런 수십-수백년간의 대논쟁의 결과였다. 특히 미국은 낙태 찬반이 좌우를 가르는 주요 기준점일 정도였다.

슬프게도 현대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거의 건국 초기부터 낙태를 특수한 경우를 빼곤 금지해왔는데, 한국인들이 낙태를 유난히 반대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낙태에 긍정적인 쪽도 아니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국민 여론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정부가 1953년 낙태죄를 신설했던 게 66년 간 유지돼왔으나, 이는 국민의 합의 없는 관료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이러한 낙태 찬반 문제는 관심가질 사람만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낙태죄 문제는 사회적으로 잊혀져 갔고, 법적으론 불법이었으나 뒤에선 할 사람은 다 하는 사문화 현상이 생겨났다. 그렇게 수많은 여성들이 음지에서 눈물 흘리면서 낙태를 하게 됐으나, 그녀들은 사회의 시선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 낙태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건 사회문화적으로 낙태를 논할 껀수가 없어서인 면도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나 이슬람 문화권은 낙태를 적극 반대해왔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철학적인 이유로 낙태를 찬성해왔지만 한국은 이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적어도 불교나 유교는 낙태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됐든, 이렇게 낙태 이슈에 무관심했던 사회 풍조가 한국의 낙태죄와 낙태 여성들의 문제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낙태죄 폐지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물론 이 현상이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이 판결이 낙태 반대론자에 의한 강한 백래쉬를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처럼 낙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으니. 미국은 낙태가 허용된 나라지만, 여전히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고, 지역별로 낙태를 막기 위한 별 괴상한 꼼수들을 쓰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낙태 반대론자가 낙태 시술하는 의사를 죽인 사례까지 있다. 적어도 한국에 이런 수준의 백래쉬가 일어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왕 낙태 문제가 급부상한 거, 지금이라도 사회적인 많은 논의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서술한 문제가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다.

 + 글의 핀트와는 어긋나지만 이왕 말 나왔으니 계속 말하자면, 나는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지만 여자한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낙태 찬성론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기 더 어려워질 거다. 임신가능성을 이유로 거부한다면 그럼 그냥 낙태하라는 식의 소리가 돌아올 수 있으니. 물론 저렇게 덜떨어진 남자들이 전체중에 아주 많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있고도 남을 일이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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