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 수도권-지방 담론이 활발하다 보니, 수도권 거주자들이 지방의 암울한 현실을 모르며 수도권에 산다는 것이 특권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수도권 청년들의 인식 이야기가 많다. 상식이 의심될 정도로 지방에 무지한 모습을 보여준다던가[각주:1], 지방 거주자들을 놀려대고 비하한다던가[각주:2]... 물론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수도권 청년들이 지방의 현실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하면서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에서 온 면도 크기 때문이다.  


- 현대 수도권 청년 절대다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수도권에 살았다. 중장년층은 그래도 어렸을 때 지방이나 시골에 살았던 기억을 가진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시골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이촌향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니. 하지만 현재는 이촌향도가 옛날처럼 흔하지 않다. 지방이나 시골 떠날 사람은 이미 많이 떠났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기억속에 지방, 시골에서의 생활풍경이 없는 청년들이 생겨나고, 이는 지방, 시골에 대한 무지를 악화시킨다.  

- 갈수록 명절을 쇠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다. 아직은 친척집이 먼 지방에 있는 경우가 많아, 명절을 쇠면 바로 시골, 지방으로 내려가서 그곳의 삶의 경험을 짧게나마 하게 된다. 그런데 명절을 점점 덜 쇠면서 잠시나마의 체험도 어려워지고 있다. 

- 국내여행 문화가 쇠퇴하고 해외여행 수요가 늘었다. 물론 여행가서 느끼는 지역의 풍경과 실제로 살면서 느끼는 지역의 풍경은 정말 차이가 크다. 하지만 국내여행 쇠퇴로 수도권 거주자들은 여행가서 느끼는 류의 지방조차 경험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위 세 변화는 모두 '수도권 청년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라는 사회문제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위 세 변화를 만들어낸 요인들이 어떤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자. 

1. 생활수준의 고도화, 도시화. 

2. 구시대적으로 여겨지는 제사 문화 쇠퇴,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식 확산. 성차별적인 명절 문화에 대한 저항.

3. 생활수준의 향상, 여가 문화 발달

이런 좋은 것들을 어떤 바보가 반대하겠는가? 청년들이 지방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드는 댓가로 위의 것들을 포기하라고 하면 다들 정신 나갔냐고 욕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수도권 청년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를 해결하겠다고 이촌향도를 다시 유행시키거나, 명절 문화를 부활시키거나, 국내여행을 다시 증진시키는 건 기껏해야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하거나 더 나아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위에서 살펴봤듯, 사회문제들은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인 사회현상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회 문제가 복잡하고 해결이 어려운 건 이런 아이러니함에서 온 면도 크다. 우리는 사회문제를 논할 때 이를 인지하고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보다 건설적이며 사실에 부합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 놓을 수 있다.

  1. 다른 도시도 아니고 전주에 '영화관'은 있냐고 물어본다던가, 여수와 부산을 단순한 관광도시로 인식한다던가.. [본문으로]
  2. 강원도 출신에게 감자드립을, 제주도 출신에게 감귤과 돌하르방과 제주도 사투리 드립을 치는 식으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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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팬이나 광신도는 단순히 자신들의 우상을 광신적으로 지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도가 심한 경우, 광적으로 지지하는 이유가 된 자신들의 우상의 인품, 언행에 열광하는 걸 넘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광적인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그 정도가 되면 광신도들은 자신들의 우상 직접 말려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광신짓했던 인간을 배신자라면서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한다. 자기들이 열광했던 우상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적으로 돌변한다. 

그 모범적인(?) 사례가 바로 이슬람 역사 극초기에 등장한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최초의 이슬람 개종자 중 한 명인 알리는 원래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헌신을 이유로 자신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스만을 암살한 자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음으로써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알리의 등극은 파벌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맨 먼저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메카의 귀족 탈하와 주바이르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가 이끌던 파벌이었다. 알리는 656년의 낙타 전투에서 반대파를 물리쳤다. 그 다음에는 우스만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충성 요구를 거부하고 우스만을 위한 복수와 그 살인자 일당의 처형을 요구했다. 두 맞수와 그 군대는 시핀 전투(657)에서 격돌했다. 수개월에 걸친 일진일퇴와 협상 끝에 온건파의 주도로 양측은 우스만 암살의 정당성 여부의 문제를 조정하는데 합의했다. 그러자 하와리즈(이탈자들)라 불리는 알리의 지지세력 일부는 알리가 그런 조정에 합의한 것 자체가 그를 칼리프로 추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저버리는 동시에 종교적 원칙에 반하는 행위라고 여겨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들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유혈사태로 인해 알리에 대한 무슬림의 지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중략) 알리가 하와리즈파에 의해 암살된 뒤, 무야위야는 자칭 칼리프를 선언했고 주요 세력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가 바로 우마이야의 왕조(661~750)의 시조이다.     

-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신연성 역, 이산, 2008, p.111-112.

초대 이맘으로 시아파에서 추앙받는 알리는 자기 광신도에 의해 허무하게 살해되었다. 결국 알리의 정적이었던 무야위야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알리 광신도들의 초기의 바람과는 정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현대 이슬람계의 수니-시아파 갈등의 뿌리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광팬, 광신도들의 잠재력인 자폭능력은 어마무시하다. 단순히 광신도짓으로 자신들 우상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걸 넘어, 자신들 우상 자체를 직접적으로 해쳐버릴지 모른다. 위 사례처럼 파괴력이 반영구적으로 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미치도록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단순히 그들의 아첨에 빠져 맛이 간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넘어, 그들이 직접 당신을 해칠 수 있기에. 


+ 비슷한 사례로 흑인 분리운동을 추구했던 과거로부터 발을 뺐다가 배신당했다고 느낀 추종자에게 암살당한 맬컴 X, 홍위병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해먹었다가 통제불능의 존재가 되어 하방시켜야 했던 마오쩌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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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를 하는 좌파들이 많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크나큰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시민교육을 못 받아 무지하기 때문에 극단화되는 게 아니다. 이는 청년들을 무시하는 사고이기도 하며, 한국의 시민교육이 부족하다고 생각되긴 하나 아주 없지는 않다. 그리고 그게 핵심인 것도 아니다. 

청년들은 좌파들이 말하는 시민성 개념에 회의를 가지고 거부하여 극단화되는 쪽에 가깝다. 

그들은 지속된 경제난으로 인해 약자에 대한 존중을 진정으로 돌봐줘야 할 자신에 대한 탄압으로 생각한다. 또 시민성과 관련된, 서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청년들의 인터넷 문화는 자기가 접하고 싶은 것만 접하게 만드는 확증편향적 성향을 띠기 때문에, 이런 가치관은 시간이 갈수록 완화되기는 커녕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교육을 강제함으로써 청년들의 극단화를 막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정치적인 가치관을 수립하기 전인 초등학교 저학년때 시민교육을 한다면 모를까, 오히려 청년들의 반발을 사 역효과만 불러올 수도 있다. 얼마 전에 페미니즘 교육을 강화한다는 뉴스에 청년들 다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돌아보자. 

경제가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좌파들이 시민성 개념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청년들의 극단화를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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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통계 등 자료를 읽으면서, 국내외 인권 문제에 대한 윤곽이나마 잡힌 사람 입장에서 써본다. 


1. 국가-개인 간 인권과 개인-개인/개인-집단 간 인권을 동일시하기. 

=> 별개의 개념인데 그냥 인권으로 뭉뚱그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세상엔 단순히 국가와 개인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국가 안에는 국가-사회집단-개인이라는 삼층체계가 존재하며, 개개인은 국가 못지않게 다른 개개인, 사회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국가-개인 간 인권 못지않게 개인-개인, 개인-집단 간 인권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으로 국가-개인 간 인권문제가 많이 해결되면서, 개인-개인 및 개인-집단 간 인권문제가 두드러진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구분이 더 필요하다. 잘 와닿을 예를 들어보자면,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 독재시절에 비해 국가의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갑질은 크게 줄었으나, 상하관계에 있는 개인에서나 집단-개인 간에 벌어지는 갑질은 충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두 인권을 제대로 구분하여야 한다. 


2. 보편타당하고 엄밀한 분석 없이 일화나 자료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기

=> 이건 예시를 드는게 빠르겠다.

"한국에서 여자가 남편/남친에 의해 1년에 100명이나 죽어나간대요! 이 나라는 여성인권 시궁창인 여혐국가인듯"

이런 식의 주장을 뭐라 하고 싶진 않지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1) 5100만명이나 사는 쿤 나라에서 살인사건 자체가 안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빈도를 줄이는 것만 가능할 뿐. 1년에 100명이라는 수치를 분석하자면 매년 여성 10만 명당 0.39명(여성을 전체 인구의 절반 2550만명으로 가정 시)이 살해된다는 의미인데, 이게 한국을 '여혐국가'로 부를 정도로 큰 수치인가?

2) 연인/부부 사이의 여성대상 살인범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정부-경찰-사법부는 충분히 할 일을 하는가?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을 했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3) 외국의 여성대상 살인범죄 상황은 어떠한가? 외국에서 배우거나 반면교사로 삼을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이런 식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물론 위에 든 예시를 제대로 파보자면 학자나 관료공무원이나 가능할 정도로 깊게 들어가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보편타당하고 엄밀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게 안 되니 매일같이 감상과 분노에 젖은 영양가 없는 인권담론이 양산되고 있는 거다. 이런 식이면 해결되는 문제는 없고 다같이 정신적으로 피로해질 뿐이다.  


3. 인권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키고, 인권만을 무조건 강제하기.

=> 요즘 인권 담론이 활발하다보니 사회복지, 경제, 외교, 이민정책같은 현실정치의 영역들을 인권 문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권 문제로 보는 게 맞는 경우도 있는데, 부적절한 경우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위험할 수 있다.  

현대인에게 인권 자체는 매우 당연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이나 사상에 반인권적, 인권침해라는 낙인이 찍히면 정당화하기 굉장히 어렵다. 인권 개념을 대놓고 부정했다가는 전근대 야만인 취급을 받을 테니. 따라서 어떤 개념이나 사상을 반인권이라 해석하는 것은, 몇몇 정치세력들 입맛에 맞지 않는 개념을 반인권적으로 몰아붙여 반론을 회피하려는데 악용될 수 있다. 또 현실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갖고 이기적인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연세계이다. 절대 인권 보장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무조건적인 인권 추구는 위험할 수 있다. 

난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 가슴아파하는 정부가 "난민들은 국가의 형편에 상관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하며, 이를 어기는 경우 인권침해이다"라는 입장을 가진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시리아 난민 같은 사례가 터지면 어떻게 될까? 굳이 여기 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인권은 인류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아무렇게나 적용해도 되는 개념은 아니다. 서구사회에서 기성 진보가 인기를 잃고 극우세력이 발호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현실정치의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진보좌파들이 무조건 자기식 인권만을 부르짖고 반대하는 세력에게 미개인, 인권침해세력, 혐오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기 때문이다.


인권은 근대 사회가 만들어낸 위대한 정신적 개념이다. 이런 인권을 수호하려면, 먼저 인권 개념을 왜곡하거나 오용함으로써 이상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 개념과 그 취지에 대한 회의가 생길지도 모른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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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가 취미고 세계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보니 사실이어도 듣기에 많이 불쾌하고, 사회적으로 큰 반발을 불러올 주장들을 많이 접한다. 사실과 당위는 다르고, 세상의 작동원리에는 복잡하게 작동하며 냉혹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실제로 접해 본 주장들을 예시로 들자면, 


1. 일제의 식민 통치는 결과적으로 조선-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2.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줄어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정당과 언론이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하고, 국민이 정부를 무조건 믿지 않는 탈권위시대의 한 단면이다. 

3. 원래 다문화사회는 제국이나 가능하다. 근대국가는 다문화인 제국이 해체되면서 생긴 단일민족국가이다. 

4.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에 사는 것은 단순히 선진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타 국가인에 비해 몇배~수십배의 생활수준을 누리는 '지대 수준의' 굉장한 특권이다.

5. 서구사회가 문제 많다고 해도 다른 사회에 비해 그나마 낫다.

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만연한 AIDS는 수많은 아프리카인을 병걸려 죽게 한 비극이지만, AIDS 방지를 통해 출산율이 줄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급격한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가 있어 결과적으로는 축복(!!!)인 면도 있다. 

7. IQ를 기준으로 볼 때, 현대 청년들은 과거의 청년에 비해 멍청해졌다.


물론 위 주장들이 전부 옳은 것으로 결정난 건 아니다. 6번은 차후 연구를 통해 틀렸음이 밝혀졌으며, 나머지 주장들도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쪽에서 비판, 반박 심지어 반증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학술사회에서는 감정적 거부감이나 사회적 파급력에 대한 우려로 사실인데도 말 못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판받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 이전의 주장이라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문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건, 불편하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한 내용을 오늘 책 읽다가 발견해서 그렇다. 불편한 주장이야 많이 봤지만 이건 정말 극강이다... 

일부 학자들은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세력 불균형의 원인[각주:1]을 다양한 요인들에서 찾고 있다. 첫째, 귀금속으로 대표되는 중동의 부가 거의 탕진될 무렵, 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자원들을 개발하였다. 둘째, 사촌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이슬람 세계의 관습유전적으로 열등한 후손들을 생산하였다. 셋째, 염소, 양, 낙타 등 지나친 방목과 목축으로 인해 한때 비옥했던 토지들이 황폐화되었다. 

- 버나드 루이스, 『무엇이 잘못되었나 - 서구와 중동, 그 화합과 충돌의 역사』, 서정민 역, 나무와 숲, 2002, p.232-233. 

이슬람-서구 문제만 해도 골치아픈데, 나치 때문에 금기시된 유전적 열등함 문제를 끼얹는다면... 

주장이 굉장히 노골적이고 담대한 나머지, 누가 이런 의견을 처음 내놓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 진지하게 이 주장을 내놓을 용기를 칭찬하고 싶다.

개인적으론 저 주장이 차라리 틀렸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만약 사실이라면 도저히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주제일 테고, 그러면 이슬람 사회 문제의 해결은 난망해질테니.. 

  1. 맥락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이슬람 세계가 서구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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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프랑스에서 많은 동료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서구의 자본주의도 똑같이 경멸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에 물든 서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부정직하며 가장 억압적인 사회>였다. 

 - 『분노의 시대 -현재의 역사』, 판카지 미슈라, 강주헌 역, 열린책들, 2018, p.190.

구 사회주의 경험자: ???

인도인: ???

중동/북아프리카인: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 ???

기타 전근대 사회 거주자: ???


내가 대륙철학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다.

사회비판 핑계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이데올로기에 맞는다고 정당화하니 짜증이 안 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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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신입생의 지리적 문맹 때문에 입문 수업에서 소개하는 학술 담론의 수준이 낮아지게 되었고, 교수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도를 짜내었다. 일부 교수들은 학생들의 이런 문제에 다른 교수들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했고, 때때로 강의실에서 벌어진 무안한 사건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도 했다. 그중 한 가지 일화는 마이애미 대학의 내 동료와 관련된 것인데, 그는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세계 백지도를 나누어 준 뒤 지리 지명을 아는 대로 적어보라고 시키기를 좋아했다. 결과는 언제나 형편없었고 해가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 교수는 수강생 전체를 채점한 뒤, 태평양, 사하라 사막, 멕시코, 중국적지 못한 다수 학생들의 명단을 신랄히 비꼬며 발표하곤 했다. (중략) 마이애미 대학의 간부들이 이 기사가 대학의 위신을 깍아내릴지도 모른다고 초조해하는 동안, 다른 지역의 교수들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테스트를 실시해보았다. 그 결과는 우리 눈에는 이미 너무나 익숙했다. 미드웨스턴 대학에서는 세계지도에서 베트남의 위치를 표시할 수 있는 학생이 전체의 5퍼센트뿐이었다. 또 다른 대학에서는, 미국의 남쪽에 이웃한 국가의 이름 멕시코라고 올바로 적은 학생이 전체의 42퍼센트에 불과했다.

- 『왜 지금 지리학인가』,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역, 사회평론, 2015, p.39-40

아니, 지리에 무지하다 해도 옆나라도 모른다는 건 심하지 않나. 

한국에서 일본이 어디있는지 모른다는 학생이 절반 가까이 된다면 나라 몇 번 뒤집히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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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폭력적인가?

이에 대한 답은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정반대로 나온다.


먼저, 폭력을 타인의 의사에 반해 단순 물리력을 행사하는 행위로 정의할 경우,

한국은 범죄율도 낮고 지역, 부족갈등 문제도 없는 매우 비폭력적인 사회이다.

한국의 이러한 비폭력성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반면에, 폭력을 타인에 의사에 반해 사회적 관계에서 유무형의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로 정의할 경우,

한국은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집단의 논리를 중시하고, 개인이 집단에 희생해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보다 심한지는 몰라도, 서구 선진국보단 폭력적이라는 덴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상반되는 현상이 크게 보면 같은 현상의 이면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한국은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을 중시하며 국가에서든 집단에서든 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폭력은 어느정도 용인된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과도하며 반사회적인 히피 및 범죄 문화가 발달하기 어렵다. 

국가와 집단에 순응하고 허튼 짓 하지 말라는 가치관이 개개인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또 학연 지연 등의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내전을 일으키거나 문자 그대로 국가를 분열시킬 갈등을 벌이진 않는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공동체의식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 물리적인 폭력은 적어졌다.


그래서 한국은 사회적 관계에서의 폭력 수준은 높은 대신 물리적인 폭력 수준은 낮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폭력 수준은 낮은 대신 물리적인 폭력 수준이 높은 미국, 유럽 선진국과는 정반대다. 



물론 두 폭력이 필연적으로 상충관계를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쪽 폭력을 줄이는 과정에서 자칫 다른 쪽 폭력을 늘릴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실제로 미국은 60-70년대에 기성 권위주의 질서에 대한 반발로 히피 문화가 발달하면서 범죄율이 급상승한 바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주제인데 나중에 이 주제로 제대로 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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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drlabs.com/kr/feminism-5/test.php


여기 들어가서 문제 42개를 풀면,

자신이 페미니즘의 어떤 조류와 제일 가까운지 그래프로 설명해준다.



참고로 본인은 이렇게 나온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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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 일반화는 항상 집단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며, 이로 인한 차별도 아무렇지도 않게 정당화한다.


중수: 일반화는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차별을 조장하므로 무의미하다고 일축하며, 인간 개개인을 보라고 외친다.


고수: 일반화가 때때로 집단을 이해하는 데 유용함을 인정하되, 무조건적인 일반화나 일반화로 인한 차별은 경계한다. 



인간은 살면서 여러 범주의 인간들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되므로, 교류하는 집단을 지혜롭게 일반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은 물론 사회 단위에서도 이런 능력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인간사의 비극은 인간들은 하수가 절대 다수이며, 중수는 소수고 고수는 더더욱 적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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