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년간 유지된 헤게모니가 전방위적으로 붕괴되면서 생긴 무질서가 아닐까.


당장 한국만 해도,


1. 현행 방식의 징병제에 대한 저항이 극심해짐 


2. 주류 정치인들의 수준 저하와 사법농단 사태 등으로 인한 정치권과 관료엘리트에 대한 신뢰 붕괴. 정치혐오야 고래부터 있어온 현상이지만, 그래도 예전엔 관료엘리트에 대한 충성심과 믿음은 있었는데 이젠 이마저도 붕괴되는 느낌.


3.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다는 믿음의 붕괴


4. 혈통적인 단일민족주의의 붕괴


5. 기성 성역할, 가족주의와 정상가족 패러다임의 붕괴


6. 기술 수준이 올라가고 문화 컨텐츠의 발달로 인한 공통의 대중 문화라는 개념의 붕괴


7. 수도권-지방격차 심화와 이에 대응한답시고 만드는 지방분권으로 인한 중앙집중적 국민의식 붕괴


8. 박근혜의 몰락으로 말미암은 박정희주의라는 시민종교의 붕괴


9. 한국의 국가 위상이 올라가고 서구 선진국과 일본이 몰락하면서, 더 이상 서구 선진국과 일본을 '추앙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음. 


등등.... 붕괴중인 구조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국제정치도 그러하다. 


1.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비서구사회가 부상하면서 서구사회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됨.


1-1. 미국이 점점 고립주의적인 정책을 씀. 심지어 이게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지속적인 현상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함.


1-2. 이로 인해 세계가 서구식 민주주의, 인권만이 답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함.


2. 세계화가 경제적이든 사회문화적이든 여러 부작용을 낳음.


2-1. 이민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인, 정체성으로서의 혼란 -> 민족주의, 정체성 정치의 활발화.


2-2. 서구 선진국의 빈부격차 가속화. 


2-3. 초국가적 기구들(EU, NATO, WTO 등)의 영향력을 국가들이 갈수록 내정간섭으로 여기고 있음.. 

 

3. (2와도 관련되지만) 2008 금융위기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음. 몇 년 안에 금융위기가 재발한다는 예측도 있는데, 그게 정말 현실화된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혼란에 빠질 것임.


4. 기후변화 문제가 있다. 개발도상국이나 열대/건조지역 국가들은 자칫 국가체제가 붕괴될 수도 있는 상황.



국내든 국제든 무질서화는 막을 수 없는 일인데... 이 무질서가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해결될지 감이 안 선다.

문제는 역사가 여러차례 증명했듯 어떤 질서든 간에 붕괴되어 무질서가 되면 크나큰 혼란이 발생하며, 혼란을 해소할 새로운 질서가 괜찮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론 새 질서가 유토피아일 가능성보단 디스토피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물론 두 가능성 모두 높진 않고, 제일 높은 가능성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세상이지만. 


최소한 내 가족이나 나라만이라도 난리로부터 최대한 자유롭기를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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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논쟁에서 개인주의 편이다. 집단주의가 개인을 억압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일부 존중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데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깊게 뿌리박힌 네트워크적인 삶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불러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은 왜 한국인이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며, 집단주의를 단순히 '개인보다 집단 중시한다' 같이 윤리적인, 사회철학적인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문제는 윤리, 사회철학의 수준을 넘어선다. 집단주의적인 한국인과 개인주의적인 서양인들의 차이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세계관의 차이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여러 사고의 근원이 되는 기초적 사고방식 자체가 자체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국인과 서양인들의 윤리나 사회철학도 거기서 파생되어 달라지게 되었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자세한 내용은 http://www.veritas-a.com/news/articleView.html?idxno=7863를 보라고만 하겠다. 

여기선 위 글에 나온 한 유명한 사례만 들어보자.






"당신은 닭, 소, 풀 중에서 두 개를 묶으라 하면 어떻게 묶으시겠습니까?"



여기서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소와 풀을,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닭과 소를 하나로 묶는다. 

동양인들은 소가 풀을 먹는다는 '관계, 맥락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서양인들은 닭과 소는 같은 동물이라는 '범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에서 나온 유명한 실험이다. 간단한 일 하나에도 드러낫듯 서양인과 동양인은 기초적인 인식 방식 자체에 차이가 있다. 그러니 도덕, 윤리, 철학은 얼마나 다를까?


한국의 개인주의자들은 위 책 『생각의 지도』를 읽을 필요가 있다. 집단주의가 왜 못마땅한지 제대로 알기 위해선 일단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가이드라인을 잡는 데 매우 좋은 논점을 제공할 것이다. 



+ (정정) 실수로 닭을 양으로 써서 수정했습니다. 글을 먼저 쓰고 사진을 나중에 쓰다보니 이런 황당한 실수가..;;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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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미국이 21세기에도 현재와 똑같은 형태로 존속할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이기 때문에 독일과 일본처럼 보다 동질적인 사회에 비해 깨지기가 쉽다. 1992년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게재된 제임스 커스의 글에 따르면, 민족국가 사회는 대규모 징병제도에 의한 군대와 표준화된 공립학교 제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다문화적 국가체제'는 전적으로 지원병에 의존하고 첨단기술을 갖춘 군대를(나는 경쟁관계에 있는 가치관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들도 포함시키고 있다) 특징으로 한다. 그런 다문화적 국가체제는 국제언론매체와 오락산업이 '국내 정치세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문화 속에서 작동한다. 바꿔 말하자면 민족국가란 모든 구성원이 비슷한 노선에 따라 교육받고, 국민이 지도자를 본받으려 하며, 모든 구성원(최소한 모든 남성)이 혹독한 군복무를 체험하는 공간, 그럼으로써 애국심 고취가 쉽게 되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 로버트 카플란, 『무정부시대가 오는가』, 장병걸 역, 코키토, 2001, p.72-73.


 구절 자체는 민족국가와 다문화국가를 대조하는 부분이지만, 민족국가를 설명한 구절을 보니 너무 한국 이야기라 깜짝 놀랐다. 아마 한국처럼 위 구절들을 적확히 맞추는 나라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


1) 민족국가 ->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동질적인 인구구성을 가진 나라다.

2) 엄격한 징병제 -> 기형적인 수준이라 문제가 될 정도.

3) 지도자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 -> 가부장적인 강한 지도자를 원하는 박정희적인 마인드는 적어도 기성세대엔 강하다. 

4) 표준화된 공립학교 ->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예전부터 어렴풋이 생각하던 내용인데, 

한국은 피식민 국가 중 민족국가로서 제일 성공한 케이스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문제라면 저출산 고령화와 이민, 징병제와 과도한 입시교육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이런 체제가 지속되기 힘들어보인다는 것.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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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0189


정치외교 전문 칼럼리스트인 로버트 카플란 책은 『지리의 복수』라는 책 이후 두 번째다. 국제정치 설명에 있어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명저로서, 국제정치나 지리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강추하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카플란 이름값을 따라 이 책까지 알게 되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굉장히 재수없는 책이다. 출판된 지 2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책인데도, 책에서 내놓은 경고나 예측들 절대다수가 맞아떨어졌고, 이 대부분은 사람 불편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안 그래도 카플란의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문체 때문에 그 특성이 더 심하게 다가온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로버트 카플란은 평화나 민주주의같은 이상적 가치도 좋으나 그 이전에 국제정치가 권력투쟁의 장임을 명심해야 하며, 국익증진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여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극렬 현실주의자다. 또한 카플란은 국가의 지리적인 특색이 정치, 경제, 사회문화 그리고 외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국가는 지리적 운명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보는 지리 결정론자이다. 딱 봐도 대중에게 인기있을 성향은 아니며, 이게 그의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더 심해졌다.  


저자가 책을 쓴 90년대엔[각주:1] 소련이 해체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체제대결에서 확실하게 승리했으며,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가 골고루 풍요로워지며 평화를 누릴 거라는 장밋빛 예측이 만연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토마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나 『세계는 평평하다』같은 유명한 책들은 그런 풍조 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카플란은 그런 장밋빛 예측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오히려 냉전 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이 책은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과 충돌』[각주:2] 같은 책과 일맥상통하는데, 불행히도 2019년 시점에서 볼 때 국제정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예측에 더 가깝게 움직였다.



책에서 펼쳐놓은 주요 분석이나 예측들을 살펴보자면.


1. 냉전 이후 개발도상국들은 점점 무질서의 영역으로 빠져들 것이다. 개발도상국은 인구 폭증,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무분별한 도시화로 인한 슬럼 문제, 부족주의와 문화적 충돌 등의 문제를 앓고 있으며, 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을 위협하는 걸 넘어 국가 자체를 붕괴시키거나 재정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격차는 더 커질 것이며, 이런 분열은 선진국조차 위협할 수 있다.


2. 민주주의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세계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중산층 수준의 생활 수준에 도달했거나, 정치적으로 국민들이 통합되었으며 중앙관료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동네에서나 기대해볼 만하다. 그렇지 않은 지역에 함부로 민주주의를 강요했다가는 민주주의가 부족주의적 욕망에 악용되거나 국가를 껍데기만 남은 무질서체제로 만들 수 있다. 그런 민주주의보단 차라리 중국이나 싱가폴처럼 '적절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독재체제가 더 낫다. 


3. 홀로코스트나 제노사이드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막기 위해선 전범재판을 벌이거나 타국가에 군대를 파병하기보다는 권력 집단 간 세력 균형[각주:3]을 이루는 게 더 좋다. 그것이 더 확실하며 국민 여론의 눈치를 덜 볼 수 있는 방법[각주:4]이다.


4. 선진국 엘리트들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개발도상국에 파견나간 엘리트조차 자기 거주지 바깥의 삶은 직접 접하기 힘들며, 선진국스러운 사상과 이념이 강하게 뿌리박혀 실제 현장에서 목격한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선진국 엘리트들은 개발도상국을 분석하면서도 자기들이 이해가능하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본다. 따라서 이들은 왜 개발도상국에서 민주주의 붕괴, 내전, 학살 등의 문제가 반복되며. 국민들이 왜 천박한 마음가짐을 가졌으며 일상보다는 차라리 전쟁터에서의 영웅스러운 삶을 원하는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5. 다문화주의를 통해 이질적인 국민들이 유입되고, 세계화로 엘리트들이 애국심이 줄어들며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이 서민들과 분리되고,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매스컴이 대중의 문화를 경박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현상은 선진국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 특히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이런 현상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며, 연예인같은 지도자를 양산하여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6.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해롭다. 무조건 평화만 추구하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포기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인류는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의 적을 인식함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고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만들 수도 있다. 


7. UN은 국가들 간의 합의체이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하려면 국가들 전체 즉 세계 전체가 똑같은 가치관과 사고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한 데다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이것이 UN이 유명무실한 기관이 된 이유이다. 



보다시피 이 주장들은 전부 맞는 것으로 결정난 듯 하다. 1은 시리아, 이라크, 예멘, 아프간, 나이지리아, 리비아 등의 내전을 통해 분명해졌고, 2.는 아랍의 봄이 튀니지 빼고 죄다 실패로 끝난 데서 확인할 수 있고, 3.은 각종 전쟁 범죄에 국제기관이 무력한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으며, 4.는 르완다를 GGI 지표를 핑계로 '미국보다 성평등한 사회'라는 식의 뻘한 분석이나 내놓는 세계 메이저 언론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5.는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이고, 6.은 한국 진보좌파를 보면 어느정도 동의가 되며, 7.은 논리를 보면 자동으로 끄덕거려진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전부 사실로 드러난 내용이기에 반박도 할 수가 없으니, 보는 독자들은 힘이 빠질 뿐이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읽으면 알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저자가 좀 '꼰대 틀딱' 성향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으며 현대 사회에 찾기 힘든 희대의 명저라 한 걸 보면 말끝마다 삼국지를 강조하는 한국의 중장년 남성들이 연상된다. 그리고 대중매체로 인해 현대사회가 타락했다는 투의 내용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도 많이 나와 너덜너덜해진 주장인데다, '게임이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식의 논리가 자꾸 연상이 된다. 


극단적이어서 동의하기 힘든 주장도 있었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에겐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나으며, 독재국가가 의외로 민주국가보다 부패가 적다는 식의 주장이 있었는데, 그건 독재자가 리콴유, 박정희, 피노체트, 장제스처럼 민주주의를 억압하더라도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개념인일 때나 성립하는 주장이다.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마오쩌둥, 뒤발리에 부자, 차베스와 마두로, 사담 후세인, 이디 아민 같은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었나? 


또 저자가 국제정세에 대한 비관론을 설파한 건 1990년대의 발칸반도나 서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여러 내전을 보고서인데, 이들 국가에서의 분쟁은 현재 대부분 해결되었으며, 나름의 노력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아주 비관적인 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내전들도 잘만 하면 예전에 벌어졌던 분쟁처럼 잘 봉합될 수 있다. 



그래도 저자가 남긴 메세지는 현재 시점에서 의미심장한 것들이 많으며,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정체성 정치가 유행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점에선 더더욱 그렇다. 20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고, 20년 뒤에도 의미심장하게 읽을 글을 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카플란은 그걸 해낸 정말 통찰력 있는 칼럼리스트이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10점 만점에 9점은 줄 좋은 책이다.  

  1. 출판은 원서 기준 2000년에 이뤄졌으나, 이 책은 그가 90년대에 쓴 칼럼과 논문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본문으로]
  2. 냉전 시기엔 자본주의vs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냉전이 지난 시대엔 서로 다른 문화나 가치관을 가진 '문명'들로 세계가 나뉘어 분쟁을 벌일 것이라는 게 요지이다. [본문으로]
  3. (신)현실주의에서 단골메뉴처럼 내놓는 평화 유지 방법. [본문으로]
  4. 처음에는 국민이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파병을 원할 지 몰라도, 자국민 전사자가 발생하면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된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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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 비극적 역사에 대한 기억이 없는, 따라서 지혜가 부족한 지도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지도자들이 역사적 경험 부족을 진지한 독서로 메울 것 같지도 않다. 오락과 편리성을 숭배하는 장기간의 평화는 갈수록 천박한 지도자들을 배출할 것이다. 대중사회인[각주:1]은 지배하는 동시에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이런 어린애 같은 지도자들은 지혜보다 전문성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지혜로운 보좌관을 곁에 두기도 어려울 것이다. 장차 평화시의 지도자들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사제단'을 위시한 사회과학 분야 전문가들일 것이다. 그들은 난해한 특수분야 논문이나 전문용어에는 익숙하지만 위대한 철학들에는 문외한들이다. 미국의 국내적 평화가 60년쯤 계속된 후 젊은 백악관 보좌관들의 사고방식이 어떨지를 생각해보라. 그러면 평화가 60년간은 지속된다 해도 61년째에는 깨질 수밖에 없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천박한 지도자와 보좌관들은 지혜와 경험의 부족으로 결국 끔찍한 계산 착오를 범해 전면전을 초래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역사적 경험은 이런 비극적 역사의 자기수정 사이클이 여전히 작동중임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전쟁 후 수십 년간 지속된 유럽의 평화는 과거에 대한 비극적 감각이 결여된 통치자들을 낳았고, 그들은 결국 휘청거리며 제1차 세계대전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 로버트 카플란, 『무정부시대가 오는가』, 장병걸 역, 코기토, 2000/2001[각주:2], p.194-195. 





첫째문단은 완전히 현실화됐고, 둘째문단이 어떻게 되느냐가 관건인데... 제발 둘째문단처럼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19년 전 나온 책인데도, 현 시대를 놀라울 정도로 통찰력 있게 서술하는 책이라 더 불안해진다. 


책 읽다 이렇게까지 소름끼친 건 오랫만이다.

  1. 개성을 잃고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는 사람. [본문으로]
  2. 현지 출판 기준. 한국어판 출판은 2001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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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밑엔 지하실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어지간한 비참함, 부조리함, 잔혹함엔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흔히 개도국의 사회문제 하면 전쟁, 빈곤, 독재, 부패, 인권 탄압, 후진적인 가치관 등을 떠올린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문제가 개도국 국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포괄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는 건 모르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한국인들은 위 발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일단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근데 단순한 분노를 넘어섰다.


이 짤은 인터넷의 '사탄조차 거를 발상' '사탄 1패' '사탄: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같은 사탄 드립의 기원이 되었다. 

도저히 사람xx가 할 발상이 아니라, 악마의 대명사 사탄도 거르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나올 급의 미친 발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들은 저런 말도 안 되는 발상엔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런데 저런 사탄도 거를 일이 일상생활에 버젓이 벌어지는 나라가 있다면 어떨까?



위 짤처럼, 공무원의 이름[각주:1]으로 '없던 규정도 만들어서' 약자들을 갈취하는 부패문화는 인도, 베네수엘라, 카메룬 같은 개도국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공무원의 횡포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냐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다음 그냥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 경찰서에선 무자비한 고문과 열악한 구치소가 기다리고 있다.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재판 한 번 걸리는데 몇 년이 소요되고, 사법부가 노골적으로 경찰 비호 안 한다는 보장이 없는 나라에선 쉽지 않다. 



 

개도국 국민들에겐 미안한 소리일 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은 현실이 픽션보다 더하다는 슬픈 예시였다. 


개도국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끔찍한 현실부터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원 글에선 공무원을 '사칭'하므로 실제 공무원이 저러는 개도국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거 말고는 완전 동일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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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는 공영TV라는 곳에서 반정부 시위대 신상을 털고 앉아있고,


출처: https://www.reddit.com/r/europe/comments/an6302/polish_national_tv_releases_info_about_protesters/







헝가리에서는 지속적인 권위주의 행보로 프리덤하우스 자유지표가 '자유로움'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로움'으로 한 단계 내려갔는데[각주:1], 정부가 거기에 반박한답시고 올린 공식성명 내용이



"프리덤 하우스는 소로스[각주:2]의 지원을 받는 소로스 제국의 일원으로서, 소로스의 선거 캠페인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헝가리가 이민자의 국가가 되지 않으려 결정했다고 그는 다른 소로스 조직과 함께 헝가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개인적 의견도 아닌 공식성명으로 음모론 설파하고 앉아있다. 


공식성명으로 음모론 풀어대는 곳은 공산권이나 이슬람권 국가나 하는 지꺼리로 알고 있었는데, 볼 때마다 놀랍다. 헝가리가 구 공산권 국가이긴 했었지만...



출처: https://www.reddit.com/r/europe/comments/ando2m/hungary_and_serbia_fall_to_partly_free_status_on/

http://www.kormany.hu/hu/miniszterelnoki-kabinetiroda/hirek/reagalas-a-freedom-house-jelentes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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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나 헝가리가 포퓰리즘으로 망가져간다는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포퓰리즘은 이래서 무섭다. 

달콤한 말을 해준다고 아무나 뽑으면, 겉으론 나라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속으론 완전 곪은 나라를 만들 것이다. 


EU는 민주주의적 제도, 차별금지법 같은 것을 가입 선결조건으로 내세울 정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연합이다.   

저런 국가들을 그냥 냅뒀다간 EU의 정당성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하루빨리 저 국가들을 제재해서라도 포퓰리즘의 광풍을 막아야 한다. 

  1. 헝가리는 EU 회원국인데, EU 회원국의 프리덤하우스 자유지표가 '부분적으로 자유로움' 이하로 내려간 건 이번의 헝가리가 최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헝가리 출신의 억만장자 금융투자가이다. 유대인인데다,, 세계적으로 재단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서구적 가치를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자나 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 온갖 정신나간 음모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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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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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 간의 경쟁 관계는 소위 ‘조선족 혐오’가 아닌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동포 노동자들이 적잖은 일자리를 장악해 나가는 이유는 일을 더 싸게 하기 때문”으로 “내외국인 간 임금 격차를 없애야 이런 경쟁도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 서독 노총에서 요구했던 게 동독 노동자들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어요. 안 그러면 값싼 동독 노동자에게 모든 일이 쏠리고, 노동자들의 지위도 함께 지키기 어려워지기 때문인 거죠.” 모든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개선을 해나갈 때 내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함께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보는 다문화 가정 지원 방법론도 비슷하다. ‘다문화’로 별도 구획을 해 특정 지원을 해나가기보다는 보편 복지를 통해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하자는 것. 박 교수는 “소위 다문화 지원을 하겠다면서 한 학급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만 뽑아 놀이공원으로 현장 학습을 보내 주는 식의 거친 지원이 너무 많다”라며 “이를 보는 다른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에는 ‘다문화 가정 아이는 당연히 차별받는다’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어려움은 대부분 ‘다문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빈곤 가정’이라 발생한 것들이에요. 보편 복지로 빈곤 가정, 위기 가정을 적극 보살피면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죠.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다문화 가정 친구를 차별하면 안 돼요’라고 가르칠 게 아니라 ‘친구를 차별하는 건 나쁜 거예요’라고 가르치면 될 일이죠.”


출처: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22189036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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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 100% 동의하진 않지만 발상 자체가 흥미로웠다. 

기사엔 외노자와 다문화가정 이야기만 나오지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소수자의 정체성에 몰두하기보단 보편주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라... 

소수자의 정체성에 몰두한 정책은 다른 사회적 갈등만 양산시킬 뿐이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읽었던 불평등 관련 서적 구절이 떠오른다.

 실존적 불평등[맥락 상 집단 간 존재하는 자율성, 존엄, 자유, 권리 등의 불평등을 말한다]에만 외곬으로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이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소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데 성공하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따른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1차적 목표가 성별이나 인종 간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반적인 소득 불평등의 감소를 추진하는 편이 좀 더 바람직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시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수평적 불평등[집단 간 존재하는 불평등]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편, 전반적이고 일반적인 불평등을 방치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실존적 불평등의 해소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정체성 정치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변화를 일으켜야 유리한 집단끼리 뭉쳐 국민이 분열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이 스스로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춤에 따라 공동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단의 불만이 해소되면 다른 집단의 곤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둘째, 실존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면 근본적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들어보자. 여성주의자를 비롯한 많은 이가 성매매를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로 간주하며 이를 금지하거나 성매매 종사자에 대한 교육을 통해 그만두게 하거나 주로 남성으로 이루어진 매수자를 처벌함으로써 수요를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성별이라는 틀에 얽매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음성화될 뿐이다. 또한 성매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헛수고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의 근본 원인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다. 이 세상에는 소득이 높은 남성과 가난하고 일자리를 얻을 가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이 많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성매매가 국가적으로나 (섹스 관광에서 보듯이) 세계적으로나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관건은 성 불평등 해소에 치중하기보다는 성매매의 경제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 있다. 남성과 여성의 수평적 소득 불평등이 해소된다고 가정해보자. 여성의 졸업률이 남성을 앞서고 점점 더 부유한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성 매수자의 90%가 남성이고 성 노동자의 90%가 여성인 현실이 성 매수자와 성 노동자가 '공평'하고 '성별 중립적'인 분포를 보이는 상황으로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성 매수자나 성 노동자나 남녀 비율이 반반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성매매 반대론자들은 이러한 성과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매매가 성별로 균형적인 것으로 바뀐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성매매 문제의 근본 원인이 남녀 소득 격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 실존적 평등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손쉽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물론 보상도 크지 않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적 평등을 추진하면 우파 정치인과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할 일도 없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기본 구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적 평등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의미 있는 변화를 내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법적 평등을 이루는 단계까지만 염두에 둔다. (중략) 정체성에만 치중하는 이들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출발선 위에 올려놓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 선 위에 선 사람이 페라리 안에 있는지, 자전거를 타고 있는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출발선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들이 임무 종료를 선언한 바로 그 순간에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 『30년 세계화가 남긴 빛과 그림자 -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브랑코 밀라노비치 저, 서정아 역, 21세기북스, 2017, p. 305-308.

읽으면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보니,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이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경제적 하류/빈곤층의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각주:1] 빈곤/불평등 정책은 곧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을 위한 정책이다. 정체성 언급 없이도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후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불평등/빈곤 해결도 세금이 걸린 문제라 해결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문제의 복잡성과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사회적 소수자/정체성 이슈보단 훨씬 쉬울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체성 놀음은 파면 팔수록 노답이라는 결론밖엔 안 나오는 것 같다. 


  1. 높다고 한 건 예외가 있어서이다. The Economist에 따르면 레즈비언은 이성애자 여성에 비해 소득이 더 높다고 한다. 임신 자체가 불가능해 임신으로 인한 소득, 승진, 커리어상의 불이익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레즈비언이 이성애자보다 강자라 보긴 어렵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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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의 인종주의자[각주:1]들과 달리, 한국인 인종주의자는 진지하게 자기 인종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음.


미국, 캐나다, 호주, 서북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진지하게 자기 민족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자기들이 제일 잘 살고, 세계에 '진보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전파하는 게 사실이니까. 

자기 민족이 최고라는 사고가 올바른지는 둘째치고, 충분히 그런 주장이 말 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백인우월주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한국은 우월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인 인종주의자들은 한국인이 최고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수사이거나, 한국인에게는 한국적인 것이 최고라는 신토불이 정신 혹은 북한과 자주통일을 이루자는 민족주의적 수사에 불과하다. 한국인이 백인, 일본인보다 우월하다는 글이 적게나마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도 진지하게 한국인이 최고 우등 인종이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한국이 저들보다 뒤쳐졌어도 이런 면에선 낫다는 일종의 정신승리적인, 열등감의 발로일 뿐이다.


한국은 일제통치와 분단, 6.25 전쟁으로 극도로 빈곤해지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과거가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은 미국, 일본을 롤모델로 삼고 배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서구, 일본의 것=우월한 것이며 백인, 일본인=우월한 인종이라는 도식이 생겨났다. 그렇게 한국인은 백인, 일본인보다 아래니, 한국인은 그들의 위대한 문물과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상이 도출된다. 한국인이 자랑스러운 인종이긴 하지만 백인, 일본인만한 존재는 아닌 셈이다. 


현재 한국은 서구와 일본의 수준을 많이 따라잡았지만,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했으며 과거에 생긴 가치관은 관성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인종주의자조차 대놓고 자기가 백인, 일본인보다 우위라고 생각하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선진성을 본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2. 한국인은 국가위상이 올라가면서 인종차별의 절대적 피해자에서 절대적 가해자 쪽으로 빠르게 전이 중.


이건 한국 인종차별이 타국보다 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3.에서 보듯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에서도 말했듯 한국이 많이 발전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종차별을 할 수 있는 권력/위치에 올라섰다는 뜻이다.


나는 신좌파들의 무조건적인 구조 타령에 신물 난 지 오래지만, 인종차별에 구조적인 요소가 크게 작동한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인종차별은 구조상 갑인 사람이 저지르기 쉽다. 쉽게 말해서, 고용주 한국인이 노동자 중국인에게 "짱깨"라 부르기가 노동자 한국인이 고용주 중국인에게 짱깨라 부르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 짓을 해도 잃는 게 더 적으니까. 물론 나는 후자의 시나리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그 점에서 나는 신좌파들과 일부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빈도가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과 일본 정부에게, 해방 이후 미국과 독일에 이민갔을 땐 백인과 해당국 정부에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이는 과거 한국의 신문/문학작품에 많이 나타나 있다. 당시 한국인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빈번했다. 

그러나 한국은 생활수준이 많이 올라가 굳이 그 고생을 해가며 백인/일본인 밑에서 일할 일은 많이 줄었다. 대신 한국이 해외에서 중국인(조선족 포함), 동남아 외노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들을 차별하는 케이스는 많이 늘어났다. 이제 한국인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극우정당의 존재나 혐오범죄같은 극단적인 수준의 인종차별은 적지만, 그보다 덜한 수준의 차별과 혐오는 심각함.


전자는 현재 서구사회 상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국은 갱단 문화, 폭력 시위, 마약 유행 현상이 적은데서 볼 수 있듯 문화가 온건하다보니, 인종주의적 사고가 혐오범죄까지 가는 일은 별로 없다. 또 극우정당이 득세할 정도로 외국인 비중이 높지도 않고.  


후자는, 외국인 비하발언에 대한 터부가 서구보다 약한 데서 볼 수 있다. 한국에선 되놈, 짱깨라는 비하어를 대놓고 말하는 경우가 흔한데, 적어도 서구사회에선 공적으로는 그런 발언을 했다간 100% 징계감이다. 흑형처럼 '비하표현까진 아니지만 해당인이 불편하게 여길만한 표현'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고.  

아마 한국인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같은 인종주의 비판 담론이 학계든 언론이든 뜸한 편이라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한국인이 인종차별의 가해자가 된 역사가 짧기도 하고. 그리고 곧 언급할 4.의 요소도 있다.



4. 한국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과거사와 국가분쟁으로 타국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경우가 빈번한데 그게 해당 국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사고까지 번지는 경우가 흔하다.  

 

중국의 미세먼지, 중화패권주의로 인한 반감이 "착짱죽짱[각주:2]"같은 표현으로 번지고, 일본에 대한 역사적 악감정으로 일본 지진 피해자에게 "쪽바리들 잘 죽었다!"고 악플 다는 거에서 볼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서구 선진국 중 이스라엘 정도를 제외하면 동북아시아나 그 이상 급의 화약고에 위치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 간 대립이나 분쟁은 거기에도 있지만, 그래도 한국-북한, 한국-일본, 한국-중국 급의 수준은 아니다. 프랑스-독일 간의 라이벌 감정이 심하다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가 상당수 해결되었으며, 두 국가 모두 한국급의 군사무장을 하지도 않으며, 문제 많다지만 형식적으로나마 EU에서 같이 활동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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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국의 인종주의는 서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 


최근 신좌파 계열이 유행하면서 한국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대한 담론이 늘어난 느낌인데, 다 좋지만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땐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좀 많이 감안했으면 좋겠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때 "한국 학계의 서구의존성"을 성토하는 담론이 많이 나왔었다. 개인적으로는 많이 회의적이지만, 인종차별 같은 문제는 확실한 '탈-서구의존적인' 분석이 필요할 때이다. 

좋든 싫든 간에 한국은 서구와는 다른 환경과 역사를 가져온 사회인데, 인종차별 문제는 그게 강하게 드러나니까. 


또 무조건적인 강자-약자 도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강자와 약자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며, 약자라 해서 아무 언행이나 강자에게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모든 윤리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윤리는 보편적이다.  

백인/일본인이 한국인보다 강자라는 이유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쪽바리"라 부르고, 백인들더러 "한국 여자들과 섹스하려 안달 난 양키들"이라 부르는 게 정당화될 순 없지 않은가? 




  1. 흔히 인종차별주의자로 부르지만, racism의 직역은 인종주의이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라는 단어는 반복하기엔 너무 기므로, 인종주의라는 단어를 스겠다. [본문으로]
  2. "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 뿐이다"의 줄임말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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