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다수의 국민들이 한국사회를 총체적인 저신뢰 사회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 평가는 각 국가들의 스스로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절대적이고 객관적 기준에 근거한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저신뢰 사회가 맞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 진정 저신뢰 사회였고 지금도 저신뢰 사회라면, 지난 반세기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이 가능 했을지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도 한국사회의 일상에서는 암묵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비계약적이고 비법률적인 관행들이 만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계약서나 약관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보다는 구두 약속이나 모호한 무한책임을 근거로 한 업무처리가 흔하다. 이러한 일상의 행위들은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일어나기 힘든 것들이다. 라서 한국사회의 저신뢰 평가는 실제 한국사회에서의 신뢰의 부재와 더불어, 주관적인 인식의 왜곡에 최소한 일부 귀인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문화 역사적으로 유교적인 가치를 근간으로 한 국가와 사회체계를 운영해왔기에 국가, 사회, 기업을 하나의 큰 가족과 같은 집단으로 인식하는 가족확장성(Korean Family Expansionism)[각주:1]을 심리적 특성으로 발전시켜왔다. 이에 따라 한국 사람들은 정부, 회사 등 사회적 체계들을 가족의 속성으로 인식하고, 그런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사회적 체계에 가족과 같은 높은 신뢰를 요구하고 있을 수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오히려 거대한 가족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한국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정부, 사회, 기업과 같은 사회적 조직은 더 이상 한국 사람들의 높은 신뢰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그에 대한 불신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을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신뢰의 기준과 실제 신뢰 수준 간의 관계, 그리고 가족확장성이라는 문화심리적 요인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중략)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저(低)신뢰사회’로 평가된다. 2011년 OECD에서 발간된 보고서인 <How's Life?: Measuring Well-being 2011>에 따르면 일반적인 타인들에 대한 신뢰 수준 조사 결과, 한국은 조사대상국 36개국 중 20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OECD 평균보다 낮은 수치였다. 사법부, 정부, 그리고 언론에 대한 신뢰 수준에 대해서는 조사대상국 40 개국 가운데 각각 34위, 31위, 38위를 기록하였다. OECD에서 발간된 또 다른 보고서 <Government at a Glance 2013>에서는 한국인 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불과 25%에 불과했는데, 이는 조사대상국 34개국 가운데 29위에 해당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결과들은 활용한 문항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조사의 효율성을 위해 단일 문항으로 묻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균관대 학교 서베이리서치센터의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서는 매년 기업, 언론, 정부, 국회, 학계, 시민단체 등의 주요 기관, 그리고 사회 전반 에 대한 신뢰 수준을 측정하는데 해당 조사 역시 단일 문항을 활용, 단지 각 대상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리커트 3점 척도 상에서 응답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조사는 효율성과 현실성을 고려한 것이지만 그 신뢰성 과 타당성의 측면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신뢰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합의된 학술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른 정교한 척도가 구성되어 있지 않기에, 기존 신뢰에 관한 조사결과는 학술적 엄격성에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최상진 등(2013)은 한국에서의 신뢰 개념과 서구에서의 신뢰 개념을 비교, 양자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국에서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 등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과의 특수한 관계들 속에서 신뢰가 형성되는 데 반해, 서구에서는 비교적 넓은 범위의, 일반적인 대인 관계나 공적인 관계 내에서도 신뢰가 폭넓게 형성되고, 규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또한 한국 사람들은 상호 간 특별하고,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신뢰가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여기지만, 서구에서는 상대방이 지닌 속성이나 행위 등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및 검증이 완료되고, 상대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수반 되어야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한성열(2005)은 한국 사회에서의 신뢰란 가족을 기반으로 하여 1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가족을 넘어선 다른 일반적인 대상들에 대한 신뢰 역시 가족을 향한 한국 사람들의 신뢰를 고려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Kim(2003) 역시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속성에 근거하여, 타인과의 신뢰를 구성한다기보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맺어진 관계 그 자체로부터 신뢰감을 느낀다고 주장 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부나 기업 등에 대한 신뢰는 해당 기관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얼마나 관련이 있다고 지각하는지 여부에 따라 신뢰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더해, 신뢰에 대한 기존 조사들은 참조 집단 효과(Reference Group Effect)라는 비교 문화조사에서의 중요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Heine, Lehman, Peng과 Greenholtz(2002)는 주관적인 리커트 척도를 활용하여 비교문화 연구를 진행할 경우, 참조 집단 효과가 발생하여 연구 결과가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태도, 가치관 등에 대한 자기보고식 문항들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각각 참조 집단으로 삼는다(Peng, Nisbett, & Wong, 1997). 예를 들어, 한국인은 한국인들을 참조 집단으로 삼아 자신의 태도, 가치관의 상대적 크기를 추정하며, 미국인은 자신이 속 한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을 참고 집단으로 삼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교문화 연구에서 각 문화권 실험 참여자들의 참조 집단이 서로 상이하다면, 측정된 리커트 척도 점수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왜냐하면 참조 집단, 즉 측정치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데 활용되는 기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에 대한 국제 통계 조사 결과들 역시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 부재한 채,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리커트 응답값만을 단순 비교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한국인들의 신뢰 인식이 다른 국가들에서 보고된 신뢰 인식보다 더 떨어진다고 단순히 판단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인식 조사로 나타난 사회적 진단은 그 결과해석에 유의하여야 하며, 그 인식형성에서 사용된 참조 집단 또는 비교기준을 조사하는 학술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중략)


 본 연구에서는 부모,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 기준을 각각 확인하고, 대상들에 대한 신뢰 기준들의 차이가 실제 신뢰 수준 및 가족확장성 수준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특히 추가적 으로 가족확장성의 역할을 실험적으로 검증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사법부, 정치인, 정부 등에 대해 자신의 부모와 유사 하거나 혹은 더 높은 수준의 신뢰 기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은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보다 높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 기준과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신뢰 기준 내 관계 요인에 있어서는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 보다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더 낮았지만 신뢰 기준 내 대상 요인에 있어서는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보다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더 높았다. 
 둘째,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신뢰 기준이 높을수록 각 대상에 대한 실제 신뢰 수준은 낮았다. 히 부모에 비해 사법부,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의 기준을 갖고 있을수록 이들 대상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정부, 기업 등 다양한 사회 조직들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 체계로 이해하려는 성향인 ‘가족확장성’ 수준이 높을수록, 부모보다는 사법부와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 기준을 나타냈다. 그리고 가족확장성 수준이 높을수 록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상대적 신뢰 수준 (부모 대비) 또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통해 가족확장성의 수준을 조작한 후, 집단 간 부모-정부에 대한 상대적 신뢰 기준 간 차이가 유의미한지를 확인한 결과, 가족확장성이 높은 집단은 가족확장성이 낮은 집단에 비해 부모-정부 간 상대적 신뢰 기준 간 차이가 유의미하게 적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선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해 부모에 준하거나, 심지어 부모보다 더 높은 신뢰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본 연구의 결과는 한국인들의 신뢰 인식에 관한 기존 문화심리학적 연구들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가족이나 친구 등 친밀한 관계를 토대로 신뢰감 및 신뢰의 기준을 형성하며, 이렇게 획득된 신뢰 인식은 사회 제도나 정부, 기업, 언론, 사법부 등 비교적 거시적인 사회 조직들에 대한 신뢰감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박영신, 김의철, 2005; 최상진 등, 2003; 한성열, 2005). 그리고 사법부 및 정치인에 대해 더 높은 신뢰 기준을 가지고 있을수록 실제 각 대상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았다는 본 연구의 결과는, 한국 사회 내 ‘저신뢰’ 현상에서 여타 국가의 국민들보다 한국인들이 사법부와 정치인에 대해 더 높게 가지고 있는 신뢰 기준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 한다면, 현재 OECD 등에서 보고된 국가 간 신뢰 인식 상의 비교 결과들을 토대로 성급하게 한국 사회를 ‘저신뢰 사회’로 규정짓기는 어려운 일이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각 국가별 정부, 기업, 사법부, 정치인 등 주체들에 대한 신뢰 인식 상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거나, 혹은 고유한 신뢰의 기준들을 규명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법부, 정치인에 대한 상대적 신뢰 기준(부모 대비)은 가족확장성과 유의미한 정적 상관을 나타냈다. 즉, 가족확장성이 높을 수록 한국인들은 사법부, 정치인에 대해 부모에 준하거나, 심지어 부모보다 더 높은 신뢰 기준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가족확장성을 높게 가지고 있던 이들일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 기준이 부모에 대한 신뢰 기준에 보다 가까워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집단주의적 역사, 가족을 중시하던 유교적 가치의 지속 등에 따라 한국인들이 지니게 된 가족확장성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성향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저신뢰 현상에 대한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허용회, 박선웅, 허태균 (2017). 「저신뢰 사회를 만드는 고신뢰 기대? 가족확장성과 신뢰기준의 역할」.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 23(1), p. 75-96


 흔히 한국의 저신뢰를 분석한 글들은 저신뢰 현상을 역사적 혼란, 부정부패, 양극화 등 부정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 반응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인으로 하여금 저신뢰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 '신뢰'의 주관적 정의와 기준 그 자체를 분석한 글은 처음 본다. 독특한 해석이라 가져왔다.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라 이 논문이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 편이다. 신뢰라는 개념과 신뢰할 만하다는 심리적 판단 자체가 주관적인데, 어떻게 단순한 신뢰도 수치만 가지고 저신뢰다, 고신뢰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싶었다. 국가별, 문화권별 인식 차이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읽으면서 마음이 다 후련해지네. 

 내가 국뽕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한국이 콜롬비아 같은 나라랑 사회신뢰도가 동급이거나 낮다는 식의 연구결과를 보면 '아니 한국이 그렇게 개허접한 국가였던가?' 하는 의문이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왔다. 그걸 가지고 '한국 사회 수준은 콜롬비아급!'과 같은 식의 결론이 나오면 더더욱. 

  1. 가족확장성이란 지역사회, 기업, 정부, 언론 등 거시적인 사회 체계들을 곧 가족 체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가족 확장성이 높은 이들은 사회 내 조직들의 형태 가 운영 방식이 곧 가족의 형태 및 운영 방식 과 유사해야 한다고 여긴다. 또한 기업가-종업원, 대통령-국민 등의 관계를 곧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기업가나 대통령 등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아랫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 논문 안에서 인용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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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민 발생국의 인권 탄압을 결과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인종, 국적, 종교, 정치 등 정체성으로 인한 억압과 차별이 난민 신청의 합법적 사유가 된다면, 난민 발생국 정부는 "꼬우면 난민 되서 나라를 떠라"라는 식으로 특정 집단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탄압하는 건 정부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민을 아예 안 받아준다면 탄압당하는 집단이 집단적인 저항을 하는 등 정부도 무시 못하게 만들 방법이 얼마든지 있고, 탄압 문제를 강제로 해결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난민 선택지가 있는 이상 편하게 나라를 뜰 사람이 많고 정부도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원할 것이다. 그리고 난민 발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해결되지 않겠지.


2. 인재 유출은 난민 발생국의 장기적 존속을 위협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타국 난민을 받아들이는 건 해당국의 인구를 줄이고 고급 인재를 유출시킨다. 난민이 발생할 수준의 국가는 인적자원이 이미 열악한 경우가 많아, 향후 국가 재건 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권 탄압을 자행하는 나라가 이 문제로 고통받는 건 자업자득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한동안 이 문제로 고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게 옳은 일일까?   

한 예로, 2010년대 지구촌 최악의 비극인 시리아 내전은 인구 1/4을 해외로 유출시켰고, 이들 중엔 중산층이나 고급 인력들이 많다. 그들이 내전 종식되고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향후 시리아 재건에 장애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만약 한국전쟁 때 한국 난민이 1/4, 즉 500만명 발생해 그만큼이 타국으로 빠져나갔다면 한국이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한국전쟁 난민 절대다수는 국내 이동이었다. 중북부 지방에서 부산 피난촌까지 가는 식으로. 


3. 국제사회에서 난민이 무기화될 수 있다. 

국가는 타국 난민을 수용하는 대신 국제사회에 여러 조건을 내걸고 '안 지키면 난민을 당신 국가로 보내겠다'며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또 다른 나라로 대규모 난민을 유인하거나, 정보전을 통해 타국의 난민과 자국민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등 타국의 사회 혼란을 유도할 여지가 있다.

실제로 시리아 난민 사태 속에서 터키와 러시아가 유럽에 이런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이렇게 난민 제도의 본래 취지를 악용하고 훼손하는 악행들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타국의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이유야 많이 언급된 듯 한데, 난민 제도 자체의 문제나 결함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어서 여기에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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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대만, 중국과 같은 동북아시아 지역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봐온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따르자면, 특정 국가의 문화가 높은 평가를 받으려면

1.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겪었거나(특히 서구 제국들에게), 생활수준이 가난하다고 불릴 만큼 낮거나, 해당국 국민들이 서구권에서 차별받는 이민자 지위에 있는 등 '언더도그마'가 발동될 곤궁한 상황에 있어야 한다.

2. 해당국의 문화나 가치관이 서구 좌파들 기준에서 힙해보이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위 두 요소 중 최소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둘 다 가지고 있지 않다.


1-1. 비서구 지역 중 경제적으로 제일 잘 나가는 지역이 동북아시아다. 한/일/대만 생활수준은 선진국 끄트머리인 남유럽급은 되며, 중국은 아직 선진국 급은 아니지만 아주 못사는 나라는 아니며 고도성장 중이다. 북한 정도가 예외다. 

1-2. 일본은 식민제국이어서 동정심은 커녕 욕먹기 딱이며, 남북한, 중국/대만은 식민지배를 겪었으나 일본에 당했기 때문에 문제인식 수준이 낮고,

1-3. 동북아시아 이민자들은 교육열이 높고 가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어 서구권에서 인식이 나쁘지 않으며, 잘 성공하는 편이다.[각주:1]

2. 집단주의, 충효, 위계질서, 가부장제, 근면성실, 금욕과 절제, 교육열 등을 중시하는 동북아시아 문화와 가치관은 서구 좌파들에게 엄격하고 억압적으로 받아들여지므로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각주:2]


서구권의 정치적 올바름은 흑인/히스패닉/무슬림들을 위한 거지, 아시아인을 위한 게 아니라는 소리가 종종 나온다.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위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회의적인 정치적 올바름이 동북아시아 정체성 때문에 더더욱 싫어진다. 

  1. 교육열이 무섭다못해 대학 신입생을 점수로만 뽑으면 아시아인들이 독차지할 정도가 됐기 때문에, 아시아인에게 페널티를 주는 관행까지 있을 정도.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80924/1204815 이해 못할 짓만은 아닌데, 이런 지꺼리를 흑인이나 히스패닉, 무슬림들 상대로 했다면 좌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본문으로]
  2. 꼭 유럽이나 북미 문화가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다. 중남미 지역의 오늘만 사는 것 같은 방탕한 삶이나 만연한 범죄 및 마약문화는 특별히 나쁘게 보지 않는데, 좌파들은 68운동이나 히피들이 연상되는 이런 문화를 해방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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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기초연금이 도입되면서 자식들이 거기에 맞춰 용돈을 줄이는 부양의 책임전가현상이 나타났고

제도에 기대했던 효과가 일정부분 상쇄되었다고 한다. 


지자체 공무원에게 실제로 들은 이야기. 통계적으로 검증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일리있는 현상이다. 

물론 노령연금제도는 존치하는 게 맞지만, 생각보다는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많이 줄었다지만, 한국은 여전히 노인 소득 상당부분이 자식의 용돈인 나라라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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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들은 흔히 개발도상국이 선진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고, 그 힘으로 개도국이 선진국 생활수준을 따라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역사가 뇌리에 박혔다보니 더 그렇다. 현재진행형인 중국/인도/베트남의 성장사례가 있다보니 더더욱. 하지만 과연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내가 읽었던 책 세 권이 나이브한 통념을 반박했기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1.

 인구 가중치를 둔 1인당 소득(1인당 GDP)의 수렴 현상은 자료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는 최근 글로벌 불평등이 감소한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구 가중치를 두지 않은 각국의 1인당 GDP 자료에서는 21세기의 첫 10년을 제외하고는 소득 수렴을 확인할 수 없다. 즉 '전통적인 정의에 따른 절대적 수렴'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70년대 GDP 대비 1970년~2013년 각국 GDP의 평균 증가율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그것이 억측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도표 4-3-a>는 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1970년 소득 수준과 그 후 증가율을 보여준다. 1970년 1인당 GDP 수준에 따라 장기 증가율이 상승하거나 하락하지 않고 있다. 회귀선을 그려본다면 1인당 GDP 증가율이 2%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수평을 그린다. 이는 고소득국가와 저소득국가가 같은 속도로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도표 4-3-b>는 아시아와 서유럽, 미국,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 서구 국가의 추세를 보여준다. 이 경우에는 회귀선이 매우 뚜렷이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모양을 그린다. 예외 없이 아시아 지역에 있던 최빈국들은 43년 동안 서구 국가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인구가중 수렴뿐 아니라 비가중 수렴 역시 아시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아시아 국가만이 고소득국가의 소득을 따라잡고 있다.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서정아 역, 21세기북스, 2017, p.232-233

<도표 4-3-a>와 <도표 4-3-b>

<도표 4-3-b>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에서도 동아시아/동남아시아/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이 특히 높다.

한국 주변국가들이 특별히 경제성장을 잘 하는 셈이다. 태평양 서쪽 지역에 특출난 무언가가 있나? 

개인적인 가설을 내세우자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남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이 개도국치곤 그나마 안정된 편이라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이 지역들은 적어도 중동/아프리카처럼 부족/종교/종파 문제로 내전을 벌이거나, 구 소련 지역처럼 소련 해체 후유증 수습에 급급하거나, 중남미처럼 극심한 정치분쟁으로 내전 벌이고 사회주의 정책으로 경제를 말아먹진 않았다. 

<표 4-1> 

인용문에서 언급한 자료는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직접 관련된 표라 올려본다.  

보시다시피 아시아의 경제성장이 특별하고, 전세계에서 제일 경제성장률이 낮은 지역은 제일 못 사는 아프리카다. 『빈곤의 경제학』 서평에서 논한 최빈곤국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2.

 균제상태[각주:1]가 기존의 경제여건이나 초기의 조건과 무관하다는 첫 번째 성질은 경제성장에 잇어서의 수렴(convergence), 즉 소득이 낮은 국가가 높은 국가보다 성장속도가 더 빠를 것이고 그 결과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국가간 소득격차가 줄어들 것임을 예측한다. (중략) 그러나 [그림 18-6]에서 볼 수 있듯이 소득이 낮은 국가가 소득이 높은 국가보다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절대적 수렴(absolute convergence)은 실제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솔로우 모형의 예측은 틀린 것일까? 

 [그림 18-7]은 1965년 당시 21개 OECD 국가의 일인당 국민소득수준과 1965년-1990년 기간 동안의 연평균 성장률을 보여주는데, 터키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각주:2] 절대적 수렴에 관한 솔로우 모형의 예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결과는 OECD 국가들과 같이 경제적 환경이 유사한 국가들간에는 수렴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를 조건부 수렴(conditional convergence)이라 한다.

- 김경수, 박대근 저, 『거시경제학 제5판』, 박영사, 2016, p.610.

[그림 18-6], [그림 18-7]


+ 3. (2019.05.15 추가) 

 1820년부터 현재까지 각국의 소득 격차는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계속 벌어졌다. 1820년에 가장 부자였던 국가들이 가장 많이 성장했다. 오늘날 선진국의 소득은 평균 2만 5000달러~3만 달러이고, 대부분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소득은 평균 5000~1만 달러인 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소득은 고작 1387달러이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 현상은 그림1에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의 가로축을 따라 오른쪽으로 갈수록 1820년에 소득이 높았던 지역들이고, 이들의 성장률이 제일 높았다. 반면 왼쪽의 지역들은 초기의 소득이 낮은 지역들인데 성장률이 더 낮았다. 유럽과 영국의 식민지들은 1820년에서 2008년까지 소득이 17~25배 증가했다. 동유럽과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은 초기의 소득이 낮았고 같은 기간에 소득이 10배 증가했다. 남아시아, 중동, 그리고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운이 나빴다. 1820년에도 가장 가난했고 같은 기간에 소득 증가도 3~6배에 불과했다. 이 지역들은 서구에 비해 더욱 뒤쳐진 것이다. 그림1의 '분기식(divergence equation)'은 이러한 패턴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소득 격차의 확대에도 예외가 존재한다. 동아시아가 가장 중요하다. 이 지역은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지위가 개선된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20세기의 가장 대단한 성공 사례이다. 일본은 1820년에는 분명히 가난한 나라였지만 서구와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또다른 극적인 사례는 한국과 대만의 성장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소련도 성공 사례에 속한다. 오늘날 중국은 이러한 사례를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로버트 C. 앨런, 『세계경제사』, 이강국 역, 교유서가, 2017, p.11-15

그림1


결론은 1.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30년이 아닌 200년 단위로 경제성장을 비교했고, 그래서인지 잘사는 나라들이 경제성장을 오히려 더 잘했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



1,2,3에서 봤듯 개발도상국이 선진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아 생활수준이 국제적으로 수렴할 거라는 가설은 잘 봐줘야 애매하게 맞는 수준이다. 설령 맞는 편이라 할지라도 반례가 많이 나타나므로 모든 개도국들이 눈부신 경제성장 하는 양 이야기하지는 말자.

물론 이는 지역별 상대적인 경제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며,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절대적인 경제성장 및 생활수준 향상 자체는 『팩트풀니』 서평에서도 언급했든 사실이므로 오해하지 말자. 절대적인 경제성장/생활수준 향상이 특정 개도국들이나 지역에 집중된다는 게 문제다. 


  1. 솔로우의 유명한 경제성장모델에서, 생산함수 y=F(K,L)이 정해져 있을 때(K-자본량, L-노동량) 1인당 GDP는 장기적으로 특정 지점에 수렴하게 되는데, 이 때 균제상태에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터키가 OECD 국가들 중에선 1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낮은 편이라는 데 주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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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이 좋은지 말만 앞세우지 말고 그 우월함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정치인들이라면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앞세우는 정치인이 그렇지 않은 정치인보다 우월하다는 걸 현실정치에서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자유, 인권 후퇴를 보면서 "저걸 부정하는 미x 놈들은 뭐야?"하는 생각만 했었는데(왜 저런 생각을 하나 이해는 돼도),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에 회의적인 인간만 탓하기엔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전세계 흐름이 그렇다. 왜 저들이 이상한 걸 우리가 바로잡아야 하냐 생각이 들 지 모르지만, 그걸 따지기 전에 가만히 있으면 상태가 더 나빠질 것임은 분명하다. 어떻게든 먼저 나서야 문제를 줄일 수 있고, 그 나서는 방법 중 제일 좋은 것은 상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의 위대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앞세운 정치세력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게 사실이라 더 그렇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막상 정치 시작하면 위선적이고 비겁하고 무능한 부류들을 왜 신뢰해야 하는데? 몇십 년 전에나 통할 이야기가 머리속에 깊숙히 쳐박히고, 정책 담당자의 머릿속은 꽃밭, 현장은 그냥 개무시.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니 앞세웠던 진보적인 개념들도 빛이 바랠 수밖에. 


이 정도까지 갈 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만약에 민주주의, 자유, 인권 개념이 세계적으로 몰락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앞세운 무책임한 인간들 탓일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의의를 가졌고, 여러 무시 못할 이점들이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적인 기류가 지속적으로 만연해진다면 그들 주장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강한 반감을 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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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의 밑바닥엔 끝이 없다. 

어떤 곤궁과 비참함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비참함이 존재하는 곳이 과거와 현재의 지구촌이다. 문자 그대로 생존만 하는 삶 밑에는 굶어죽는 삶이 존재하며, 전쟁에서 총살당하는 삶 밑에는 전쟁에서 흉기로 고통스럽게 고문당하다 살해당하는 삶이 있다. 이렇게 문자 그대로 생존만 하거나 생존조차 위협받는 사람들이 지구촌에 10억 명이 넘는다. 그렇다고 세상이 나빠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2에서도 말해냈지만 그나마 개선된 게 이 지경이다. 세상을 더 밝게 만들려면,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끔찍한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2. 인류는 분명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뤄냈다. 

세계 어느 곳이든 평균수명, 영아 사망률, 교육 수준, 구매력 소득 등 거의 모든 물질적 지표는 100년 간 엄청나게 개선되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를 인정하고, 이 발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3. 선진국에서 당연한 현상들이 개발도상국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선진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개발도상국에선 버젓이 일어난다. 일상 공무를 처리하려면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게 필수적이라던가, 군부가 국가 경제 상당수를 장악하고 있다던가, 글자도 못 읽는 사람들(특히 여자)이 넘쳐나거나, 통합된 국민 개념이 존재하지 않거나, 국가의 공권력이 국토 전역에 미치지 못하고 민병대가 날뛴다거나, 복수심에 불타 이웃국가와 잘 지내긴 커녕 상대국을 고의로 골탕먹이려는 외교를 펼친다던가... 우리가 당연시한 개념들이 사실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4. 개발도상국은 선진국과는 다른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치관적 기반을 가졌기에, 선진국에서나 통할 정책이나 개념을 개발도상국에 함부로 이식하려 하면 안 된다. 

선진국들의 역사 및 시스템은 일단 서구의 것이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중국과 미국의 가족문화가 다르며, 독일과 파키스탄의 정치시스템이 다르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서구권 국가들에게 서구식 정책/개념/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잘 해 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이식하는 국가의 사회구조와 잘못 얽혀버리면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3과는 다른 이야기다. 3은 가치 판단이 들어간 선진국스러움의 문제라면, 4는 그냥 가치 판단과 무관한 차이를 말한다. 


5. 개발도상국 사람이나 집단이 선하고 고결할 거라 기대하지 말라.

좌파식 언더도그마의 영향 때문인지 약자 진영에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슬프게도 진상은 정반대에 가깝다. 적어도 선진국들의 행위자들은 추태를 벌이더라도 최소한의 가면은 쓰지만, 개발도상국은 대놓고 추태를 벌인다. 개발도상국에선 추한 모습을 볼 각오를 하는 것이 좋다. 선진국 기준에서 후진적이고 천박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데 서슴치 않는 사람들, 겉치르르한 명분을 내세우나 내부적으론 탐욕과 부패에 찌든 집단들을 수많이 목격할 것이다. 개발도상국에 관심을 가지려면 이런 모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6. 우선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발도상국에선 사회가 노골적인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경향이 강하다. 슬프게도 사회의 윤리, 도덕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이 현실을 이해해야 사회 개선을 하든 뭘 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을 따지자면, 선진국 기준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나 집단을 찾아보기 힘들기에 더 그렇다. 


7. 무질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비선진국은 선진국에 비해 사회질서가 취약하기에,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진다. 이 경우 억제된 금기의 욕망들이 죄다 분출되면서 경제 붕괴, 파괴, 고문, 살인, 강간이 일상이 되는 지옥도가 열린다. 유고슬라비아나 르완다 내전은 그 극단적인 사례이다. 정도는 좀 덜하지만 소련의 붕괴도 그랬고.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제일 고통받는 순간은 이런 무질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선진국이 개발도상국 내정에 개입할 땐 어떤 방식으로든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무질서보다는 통제된 폭력이 훨씬 낫다. 


8. 성급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위의 요소들 때문에 개발도상국은 살짝만 삐끗하면 바로 위험해질 수 있다. 1,2에서 말했듯 개발도상국 사정이 시궁창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지금이 최악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목표도 소박하게 잡은 다음, 개발도상국이 다음 단계로 무사히 이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신중하게 정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 개발도상국을 위한 행동이다.

 

9. 위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적 사고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이 이런 비참한 신세를 피하지 못한 건 지리적, 자연적인 난점과 운의 요소도 크게 작용한다. 진짜 좋은 조건에서 망해버린 나라들도 있지만, 성장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놓치거나 단순히 터가 안 좋은 데 세워져 가난한 나라들도 정말 많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아프리카 대륙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지리조건이 경제성장에 여러모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의 무능함과 한심함에 대해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이들의 조건을 생각해 무작정 깎아내려선 안 된다. 


10. 지옥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삶의 의미는 있다.

이들의 삶의 수기를 읽어보면 진짜 눈물겹다. 이들은 비참한 현실에서도 더 나은 가족들의 삶, 더 나은 공동체, 더 나은 나라를 위해 죽기살기로 생활한다. 그리고 사회의 눈부신 발전에 공헌한다. 이런 노력을 보면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게으르다는 편견도 싹 사라진다. 더불어 고통으로 가득찬 삶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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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낙태죄가 폐지되는 변화는 환영한다. 낙태를 처벌해야 할 윤리적인 당위성도 잘 봐줘야 애매한 수준이고, 법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라 뒤에선 연간 수십만건의 낙태가 벌어지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죄를 존치하거나 더 나아가 낙태죄 집행을 확실히 하자는 건 도덕적 만족감을 명분으로 뒷감당 못 할 짓을 벌이는 거다. 차라리 낙태를 양성화해 여성들이 보다 안전하게 낙태를 받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다만 낙태죄가 폐지되는 과정은 다분히 아쉽다.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충분히 되어 낙태죄 폐지 여론이 굳어지면서 국민이 선출한 국회/정부가 이에 부응했다기보단,  비선출직인 헌재 재판관들이 순수한 법논리의 곡예를 통해 결정한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여론이 낙태죄에 갈수록 우호적으로 변하니 헌재가 국민 여론도 감안해서 판결했겠지만, 이런 식의 결정은 낙태 반대론자에게 쓸데없는 반발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물론 민의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공론장과 국회 정부는 무관심의 손놓는데 관료조직에 가까운 사법기관만 일하는 건 일종의 기술독재적 현상이다. 자칫 전문관료가 대중, 정부, 국회와 괴리되어 국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엔 낙태죄와 관련된 논의가 놀랄 정도로 적었다. 이는 국가별 낙태죄와 낙태 찬반 논란 현황을 비교해본 한 논문의 실제 결론이다. 적어도 서구 선진국들은 낙태 논의가 굉장히 치열했다. 수많은 찬반 논거와 학술연구가 나왔으며 정치권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고 대중토론에서도 엄청나게 나온 단골메뉴다. 낙태죄 폐지는 그런 수십-수백년간의 대논쟁의 결과였다. 특히 미국은 낙태 찬반이 좌우를 가르는 주요 기준점일 정도였다.

슬프게도 현대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거의 건국 초기부터 낙태를 특수한 경우를 빼곤 금지해왔는데, 한국인들이 낙태를 유난히 반대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낙태에 긍정적인 쪽도 아니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국민 여론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정부가 1953년 낙태죄를 신설했던 게 66년 간 유지돼왔으나, 이는 국민의 합의 없는 관료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이러한 낙태 찬반 문제는 관심가질 사람만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낙태죄 문제는 사회적으로 잊혀져 갔고, 법적으론 불법이었으나 뒤에선 할 사람은 다 하는 사문화 현상이 생겨났다. 그렇게 수많은 여성들이 음지에서 눈물 흘리면서 낙태를 하게 됐으나, 그녀들은 사회의 시선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 낙태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건 사회문화적으로 낙태를 논할 껀수가 없어서인 면도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나 이슬람 문화권은 낙태를 적극 반대해왔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철학적인 이유로 낙태를 찬성해왔지만 한국은 이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적어도 불교나 유교는 낙태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됐든, 이렇게 낙태 이슈에 무관심했던 사회 풍조가 한국의 낙태죄와 낙태 여성들의 문제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낙태죄 폐지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물론 이 현상이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이 판결이 낙태 반대론자에 의한 강한 백래쉬를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처럼 낙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으니. 미국은 낙태가 허용된 나라지만, 여전히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고, 지역별로 낙태를 막기 위한 별 괴상한 꼼수들을 쓰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낙태 반대론자가 낙태 시술하는 의사를 죽인 사례까지 있다. 적어도 한국에 이런 수준의 백래쉬가 일어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왕 낙태 문제가 급부상한 거, 지금이라도 사회적인 많은 논의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서술한 문제가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다.

 + 글의 핀트와는 어긋나지만 이왕 말 나왔으니 계속 말하자면, 나는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지만 여자한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낙태 찬성론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기 더 어려워질 거다. 임신가능성을 이유로 거부한다면 그럼 그냥 낙태하라는 식의 소리가 돌아올 수 있으니. 물론 저렇게 덜떨어진 남자들이 전체중에 아주 많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있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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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참석자들을 포함해 모든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약[제1차 세계대전 평화협정] 내용이 관련 지역 및 주민들에 대한 지식이나 그에 대한 고려 없이 결정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유럽에 부과된 조약 내용이 그 정도였으니 거리상으로도 멀고 생소한 중동 같은 지역에 부과된 내용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아서 밸푸어만 해도 평화회의에 참석한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ㅡ모리스 행키의 전문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ㅡ를 가리켜 "이 전능하면서 또 전적으로 무지한 세 거두가 회의장에 앉아 어린애 같은 인물의 지도를 받으며 대륙들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꼬집어 말했고, 이탈리아의 외교관도 이렇게 썼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세계의 이런저런 정치인들이 지도 앞에 서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시나 강을 찾으려고 손가락으로 지도 위 그림을 더듬어가며 '그 빌어먹을 곳이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라고 투덜대는 모습이었다." 로이드 조지도 (성서의 구절을 빌려) 단에서 브엘세바(베에르셰바)까지의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통치해야 한다고 요구했지작 단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19세기 성서 지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년 후 앨런비 장군으로부터 단의 위치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원하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경계선을 북쪽으로 더 이동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 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이순호 역, 갈라파고스, 2015, p.609

서구 열강이 피식민국의 역사/지리에 무지했고 식민지배의 편리를 위해 국경을 자의적으로 그은 건 알고 있었지만, 주먹구구, 나이브함과 무책임함의 레벨이었을 줄은 몰랐네.

이건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신기한 수준이다. 중동이 분쟁지역이 된 건 예상된 바다.

+ 참고로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구 정치인들이 세계 1차대전에서 중동지역에 저지른 뻘짓과 삽질은 책을 따로 써야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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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 「창비어린이」, 2019년 봄호, p.27-36.

아쉽게도 인터넷에선 볼 수 없으니 직접 사거나 도서관에서 읽는 방법밖엔 없다. 


나도 트위터에서 알게 된 글인데, 진짜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욕 한 게 아니다. 진짜로 문장 하나하나가 명문이다. 보면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이 사회는 OO 혐오가 심각하며 규제되어야 한다"는 신좌파식 진부한 레토릭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각주:1] 그는 흔한 먹물좌파식 이론으로 글을 쓰기 보다는 자신의 특수한 처지가 바탕이 된 아동과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아동혐오 현상을 '이미지 시대'라는 특이한, 신좌파들 이론보단 훨씬 맞아떨어지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흔해빠진 선악구도가 없는 건 덤이다. 

신좌파식 레토릭에 학을 뗀 나에게 단비같은 반가운 글이다. 신좌파에 반대한다면서 지금까지 이런 발상을 못했을까...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으니.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흥미로웠던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1. 장애인의 입장에서 본 아동[각주:2]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아동기였다. 내가 어린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주로 만나 교류해야 할 동료들이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피부색, 신체, 정신 구조를 가진 존재와 함께 있을 때, 어린이는 결코 아무 획책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어린이는 또래들 사이에서 놀림과 배척의 대상이다. 장애 아동은 또래가 아니라 성인과 있을 때 훨씬 행복하다.

 아동은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동료 시민이다. 길에서 만난 어린이들은 부모 손에 이끌려 곁을 지나쳐도 시야에서 내 휠체어가 사라질 때까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몸을 비튼다. 먼 거리에서도 놓치지 않는다. "와, 장애인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다른 신체를 가진 존재를 처음 마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이해하지만, 적응하기 쉽지 않다. 멀리서 아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급적 마주치기를 피해 길을 돌아간다.

 그런데 사실 어린이가 나를 보고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데에는, 내가 어린이에게서 몸을 피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가 놓여 있다. 그 아이들이 태어난 동네나 다니는 학교에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인권 교육이나 영상을 통해 장애인의 이미지를 만나기 때문이다. 아예 이미지를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면, 아이는 나를 '장애인'이라고 특정하게 지칭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장애인과 어린이가 욕망을 가지고 부딪치고, 소란을 피우고, 진로에 방해가 되더라도 몸과 몸으로 더 자주 만나는 순간들을 상상하며 이 글을 쓰기로 한다. 소비자인 어른에게 '육성되는' 아동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른과 함께 자라는 아동을 떠올린다. 나를 보고는 "와, 장애인이다!"고 외치면서 부모에게 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에 대해 자신의 궁금증을 자기 입으로 질문하는 아이를 상상한다.

같은 책, p.27-29.

  흔히 아동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혐오에 대한 반동으로 "아동보단 개저씨가 더 위험하지 않냐?"는 식으로 아동의 잠재적인 부정적 요인들을 무조건 실드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동들이 장애인에게 보이는 철없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동은 순수무결한 선한 피해자가 아니라, 소수자이면서도 동시에 성장기에 있는 존재로서 서투르고 답답한 존재다. 나는 그의 시선에 동의하며, 소수자에도 어둡고 음침한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소수자의 진정한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아동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존재로 존중하려 시도한다. 아동들이 저러는 게 장애인을 교육이나 영상 같은 이미지로만 접했기 때문이라면서 이해하려 시도한다. 난 이 구절에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며 믿음직스럽다고 느꼈다. 장애인으로서 아동들 때문에 힘든 일 많았을 텐데, 저런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건 어지간한 인품으론 못 할 짓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각주:3]을 핑계로 한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귀감이 되기 좋은 인물이다. 

 

2. 이미지만 남은 소수자들

 아이를 양육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가치를 띠며 국가와 시장도 (최소한 규범적, 형식적으로는) 양육을 지원하고 배려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국가는 공적인 주체로서 아동을 보호하고 돌보며, 사회 구성원들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학대 및 성범죄 등이 알려질 때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동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동 혐오라는 현상을 아동에 대한 물리적 학대로만 이해한다면, 현대 사회의 특징인 아동 배제 기제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아동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하고 그에 열광하면서도, 그 속성을 벗어난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떨까? 국가 단위에서 그 속성이란 사회, 경제적 재생산의 상징, 미래의 인적 자원이자 소비자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 일반에게는, 바로 '귀여움'이다. 아동의 귀여움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에 머물지 않고 전국 단위의 '공적인 것'으로 소비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정반대로 '귀엽지 않은 아동'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동은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울고, 소란을 일으키고, 먹고, 싸고, 부수는 생명이다. 

(중략)

 '프린세스 메이커'나 유튜브, TV에서 하루하루 귀여움을 더해 가며 성장하는 아이를 지켜볼 때와는 달리, 정말로 한 생명을 돌보고, 같이 살아가며, 성장에 함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모든 동물은 생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 부모에 의해서도 쉽게 통제되지 않고,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시끄럽게 소음을 내며 운다. 아동은 (이미지로 등장할 때와 달리) 아무런 위협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바이러스와 세균을 지닌 인간이고, 먹고 배설하고, 피와 땀을 가진 '축축한' 존재다.

 현대 사회의 공적 공간은 점차 이러한 '축축한' 존재들을 추방시키고 있다. 장애인과 빈자, 특정 인종의 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공적 공간에서 손쉽게 추방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아동이 그 차례를 맞았다. 아동들은 더 이상 어른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은 어떤가? 노인들은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 기초 규범을 지키지 않는 존재로 지목되면서 젊은이들에게 혐오받는 대상이 되었다. 공적 공간은 점점 젊고, 건강하고, 세련된 행위 규범을 익한 존재들만의 세계가 되어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로서의' 소수자들이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비교적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다. 아동 유튜버들의 인기와 노키즈존의 병존은, 이처럼 이미지는 있되 물적 존재로의 몸은 마주치기 어려운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책, p.31-34.

보면서 감탄만 나오는 명문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단은 보면서 머리를 두들겨맞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현대 사회의 분노와 혐오, 정치적 올바름 등등 소수자 이슈 전반을 잘 요약해준 명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현실을 적확하게 설명한 글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요즘 사회풍조가 너무 윤리적 결벽증에 빠진 건 아닌가 싶었던 나로선, 윤리적 결벽증이 이런 현상을 낳지 않았나 가설을 세워본다. 이건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글을 따로 써야겠다. 



+ 이 저자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고, 소수자의 존엄성을 담담하게 옹호하는 책도 썼다. 칼럼 보고 믿음이 생겨서 사 봤다. 서평도 곧 올려야겠다. 

  1. 특집으로 같이 기고된 나머지 글들은 죄다 그런 레토릭이었다. [본문으로]
  2. 저자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을 받은 장애인이다. [본문으로]
  3. 냄새 난다, 잠재적 범죄자다, 이기적이다 등등...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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