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으로 접한 몇몇 일화만 언급하자면

- 과거에, 서구식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같이 반대한답시고 진보좌파들이 이슬람주의[각주:1]와 같은 편에 섬. [각주:2]

- 독일에서 유대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폭행당하는 반유대주의 범죄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다들 네오나치즘, 반유대주의를 크게 우려했으나, 정작 범인이 무슬림으로 밝혀지자 그 우려의 시선이 동정으로 바뀌었다. "오죽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심했으면 저랬을까?" 따위의 시선들이 넘쳐남. [각주:3]

- 모 유럽 국가에서, 한 모로코계 가정의 아내가 남편이 자신을 폭행한다고 이혼신청을 했다. 그러나 법원은 모로코 가정문화 특성상 가정폭력이 흔하며 여자는 그걸 알고서 결혼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림. [각주:4]

- 이슬람교와 이슬람 사회의 전근대적인 면모를 엄격하게 비판한 인권운동가 아얀 히르시 알리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명예학위 수여를 위해 초청받았다. 그러나 진보좌파들이 이슬람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이라며 항의를 하는 바람에 중단됐다[각주:5]


.. 무슬림들의 문제지꺼리를 방치하는 선을 넘어 옹호까지 했으니, 이슬람 문제가 안 터지길 바라는게 이상하다. 처음 이부분을 읽으면서 어이가 없어 벙쪘었다. 

지금은 진보좌파들도 옛날만큼 이슬람에 우호적이지 않지만, 이미 문제가 많이 심각해진 상황이라 문제해결이 쉽진 않을 거다. 최소 10-20년은 고생할 것이다. 


+ 원래는 인용문을 정확하게 쓰려 했는데 책들이 도서관에 있어 내용만 적는다. 도서관에서 책 빌려읽으면 이래서 안좋아... 

  1. 이슬람을 국가 운영 원리로서 삼아야 한다는 정치화된 이슬람. 정교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배교자와 동성애자를 처형하자는 등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주장을 내놓아 문제가 되고 있다. [본문으로]
  2. 바삼 티비, 『이슬람과 이슬람주의』, 유지훈 역, 지와사랑, 2013 [본문으로]
  3. 바삼 티비, 『이슬람과 이슬람주의』, 유지훈 역, 지와사랑, 2013 [본문으로]
  4.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18 [본문으로]
  5. 아얀 히르시 알리,『왜 나는 이슬람 개혁을 말하는가』, 이정민 역, 책담, 2016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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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에 대한 책을 읽다, 개인적으로 압권이었던 장면이 있어 한번 옮겨본다. 

배넌의 확신에 따르면 새 트럼프 행정부의 첫 행보는 이민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외국인 문제에서 트럼피즘에 대한 열광의 완벽한 예를 볼 수 있었다. 이 주제를 띄우면 흔히 외골수 과격파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묵살당했지만ㅡ제프 스세션스는 그런 까다로운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ㅡ트럼프는 많은 이들이 외국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왔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트럼프 이전에 배넌은 이 문제에 관해 세션스와 연대했었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은 자국민보호주의nativism가 정말로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알아볼 수 있는 갑작스러운 기회였다. 그리고 그들이 승리했을 때 배넌은 자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책에 열과 성을 다할 거라는 선언을 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해했다. 더구나 그것은 진보주의자들을 치게 떨릴 만큼 분노케 하는 이슈였다.

(중략)

진정한 목표는 진보적 견해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진보적 세계주의자들은 법과 규칙과 관습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의 신화를 추구했다. 그것은 진보진영이 갖는 이중의 위선이었다. 왜나면 쉬쉬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불법 체류 외국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보진영이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간단한 겁니다." 배넌이 말했다.

배넌은 처음부터 진보적이지 않은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자만심을 아예 벗겨내려는 의도로 행정명령을 추진했다. 그는 최소한의 혼란을 일으키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진보주의자들을 붙잡아두는 데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중략)

1월 27일 금요일에 여행금지 명령에 대한 서명이 이뤄졌고 명령은 즉시 발효됐다. 그에 따라 진보 매체의 혐오와 분노가 쏟아졌고, 이민사회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주요 공항에서 격앙된 시위가 벌어지고, 온 정부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백악관에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설교와 경고, 비난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지금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나? 이 일은 없던 걸로 돌려놓아야 해! 당신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버렸어! 대체 누가 이 일을 책임지고 있지?'

그러나 스티븐 배넌은 만족했다. 그는 두 개의 미국을 가르는 선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그리기를 바랄 수 없었다. 그것은 트럼프와 진보진영 사이의 선이며 그 자신의 백악관과 아직 모든 걸 태워 없애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백악관 사이의 선이었다. 

'우리는 왜 하필 금요일에 이 일을 해야 했지? 수많은 공항에 가장 큰 파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시위를 불러일으킬 날에?' 거의 모든 백악관 직원들이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배넌은 이렇게 말했다. "음... 왜나하면 잘나빠진 진보주의자들이 공항에 나타나고 소동이 벌어질 테니까." 그것이 바로 진보주의자들을 짓밟는 방식이었다. 그들을 미쳐버리게 하고 더 극단적인 좌파로 끌려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 마이클 울프, 『화염과 분노』, 장경덕 역, 은행나무, 2018, p.110-116.


총평

자칭 현대 선진국의 정치.jpg


사회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빡치게 만들고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라니. 참 신박하지 아니한가.

멀쩡한 사람들도 편 갈라 싸우게 만든다는 분열쟁점(wedge issue)의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분열쟁점을 위한 정치는 자기 진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술수일 뿐이다. 상대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인 건 처음 본다. 

포퓰리즘의 위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지만, 그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듯 하다. 내가 졌다. 


+ 저런 발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관련 부분을 추가로 인용해보자면, 


별것 아니지만 배넌의 정치 경력 전부가 정치 매체에 있었다. 그것은 또한 인터넷 매체였다. 다시 말해 즉각적인 반응에 지배되는 매체였다. <브레이트바트>의 공식은 진보주의자들을 질리게 해서 기본 독자들을 이중으로 만족시킴으로써, 혐오와 기쁨이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클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적의 반응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갈등은 미디어의 미끼였고 이제 정치의 밑밥이었다. 새로운 정치는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갈등의 기술이었다. 

- 마이클 울프, 『화염과 분노』, 장경덕 역, 은행나무, 2018, p.111-112.

배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터넷과 SNS가 지배적인 시대의 정치 역학은 과거와 확실히 다르다. 포퓰리스트들의 득세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이 역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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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1&aid=0010526450

전체 신청자 484명
14명은 출국 등 이유로 직권종료.
2명난민 인정.
412명인도적 체류.
56명난민 불인정.

심사를 완료한 470명만 놓고 보면

난민 인정률 : 0.4% (2명/470명)
인도적 체류 비율: 87.7% (412명/470명)
난민 인정률+인도적 체류 비율: 88.1% (414명/470명)
완전 불인정률 : 11.9% (56명/470명)

난민 인정률만 보면 매우 낮아 보지만, 인도적 체류율까지 합쳐보면 매우 높다.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모르겠다.

왠만해선 ㅇㅋ 일단 체류'는' 시켜줌 정도의 스탠스인 듯은 한데...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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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치행동은 결국 악일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을 인정할 때만 더하고 덜한 악을 구분하고 그중 덜한 악을 택함으로써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살 수 있다.

정치와 윤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과학도, 윤리도, 정치도 아니다. 권력을 택할 것인가 선행을 택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잘 행동하라는 것은 결국 정치적 기술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정치적 지혜이다. 모든 정치적 행동은 악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 용기이다. 현실 속에서 불가피한 행동을 취하되 그 중 해악이 가장 덜한 행동을 택하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다. 정치적 지혜와 도덕적 용기, 그리고 도덕적 판단을 조합함으로써 인간은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운명과 도덕적 운명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와 같은 조화가 불편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모순적인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허울 좋은 조화에 만족하여 인간의 삶에 따르는 비극적 모순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Morgenthau, Hans Joachim. Scientific man vs. power politics. 1st e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6. (김태현 역, 『과학적 인간과 권력정치』. 파주: 나남, 2010, pp.259-260).

출처: http://sonnet.egloos.com/4632737

예전에 봤을 땐 현실세계의 잔혹함에 대한 냉소적 표현으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는 정확한 묘사다. 

저런 말이 공감될 때가 오다니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걸까...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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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포함해 40대 이상의 어른들과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데,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이 있다. 

바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인식이다. 

나는 어른들에게서 "한국은 옛날엔 못살았고 한국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듣보잡 국가였는데, 이제 한국은 많이 잘살게 된 데다 많이 알려진 대단한 나라가 됐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봤다. 

사실 어른들의 생애를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이들이 어렸을 때 한국은 지금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못 살았고, 한국산 물품과 문화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낮았던 순수 내수용(?)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도 별로 없었다. 가부장적 가치관, 가정폭력, 똥군기 등 문화적인 문제는 지금보다 더 심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기성세대가 된 현재 한국은 선진국으로 인식되고, 한국산 전자제품과 K-POP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한국인이 유엔사무총장과 인터폴 총장 등 세계 방방곳곳에 진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다곤 해도 문화적인 문제도 많이 개선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에게 한국의 현재 위상은 전혀 당연한 게 아니다. 웃어른들과 자기 세대가 다들 노력해서 겨우 일궈낸 성과이다. 

반면 청년들은 한국의 현재 위상을 특별히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이 못 살고 인지도 낮던 시절에 살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컸을 때 한국은 이미 일본과 생활수준 차이가 별로 없고, 전세계에 영향력을 펼치며 문화적 문제도 어느정도 개선된 나라가 되었다. 그들에게 한국이 잘살고 전세계에 영향력을 펼친다는 건 상수이다. 

기성세대와 청년 간 세대갈등이 심하다고 한다. 아마 이 갈등 대부분은 가치관이나 청년들의 경제적 문제에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재 위상에 대한 평가 차이는 이 갈등을 격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국 청년들에게 과거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고,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음을 명심하라고 하는 건 꼰대짓임과 동시에, 자기들에게 경험도 없는 과거를 강요한다는 과거팔이로만 생각될 것이다. 안 그래도 현재 청년들은 취업난 및 불안정한 미래전망으로 한국 사회에 불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자세는 있는 갈등만 크게 할 뿐이다. 

한국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어왔기에 세대 간 사회인식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뻔한 말이지만 서로가 살아온 삶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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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책이나 기사, 칼럼들을 종합하자면. 


국제적 요인

1. 중국, 인도, 일본 등 비서방 패권국들이 부상하면서 기존 패권구도가 흔들림.

2. 미국이나 EU 등의 서방세력이 내 코가 석자라며 세계 패권으로서 책임을 기피하려 듦.

3. 세계화의 확산으로 불평등, 이민문제가 생겨났다. 

4. 세계 금융위기와 그 휴유증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5. 국제기관, 다국적 기업, 사법부 등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민주권이 위협받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됨.  

6. 옛날의 폭압적인 독재정권들이 실패로 끝나면서, 독재자들은 국민의 인기가 바탕이 되는 포퓰리즘 독재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적 요인

1. 기성 정치세력의 역량이 점점 떨어지고 무능해지면서, 국민들이 기성 정치를 실망하고 냉소함.


기술적 요인

1.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면서, 기존에는 비주류였던 정치세력이나 가치관도 매체를 통해 쉽게 세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2. 인터넷과 SNS는 개개인이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고 타인과 교류한다는 특성이 있어, 확증편향과 집단 간 양극화를 부채질한다. 이는 극단적인 정치성향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가치관적 요인

1. 이슬람 사회의 쇠퇴, 열악함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이슬람 원리주의가 유행하고 있음. 더불어 반서구 이슬람 테러리즘도 인기를 끔.

2. 탈권위적인 가치관 확산으로 인해 기성 권력에 대한 권위가 실추됨. 

3. 사회담론을 주도했던 기성 좌파 학술계가 힘을 잃기 시작함.


크게 따지자면 이 정도가 될 듯? 

단순히 현재의 세계정치 혼란을 경기불황이나 세계화, 이민 문제 정도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 넓은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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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학술계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옛날만 못함을 느낀다. 특히 좌파성향 강하며 사회담론과 밀접한 인문학-사회학 쪽은 아예 존재감 없어져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기성 사회집단에 대한 불신과 기술 발달로 인한 매체 다양화가 합쳐져 나타난 결과일까.

남탓만 하지 말고, 기성 학술계는 어떻게 영향력을 부활시킬지 고민할 때이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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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분권, 수도권-지방 담론이 활발하다 보니, 수도권 거주자들이 지방의 암울한 현실을 모르며 수도권에 산다는 것이 특권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수도권 청년들의 인식 이야기가 많다. 상식이 의심될 정도로 지방에 무지한 모습을 보여준다던가[각주:1], 지방 거주자들을 놀려대고 비하한다던가[각주:2]... 물론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수도권 청년들이 지방의 현실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하면서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에서 온 면도 크기 때문이다.  


- 현대 수도권 청년 절대다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수도권에 살았다. 중장년층은 그래도 어렸을 때 지방이나 시골에 살았던 기억을 가진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시골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이촌향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니. 하지만 현재는 이촌향도가 옛날처럼 흔하지 않다. 지방이나 시골 떠날 사람은 이미 많이 떠났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기억속에 지방, 시골에서의 생활풍경이 없는 청년들이 생겨나고, 이는 지방, 시골에 대한 무지를 악화시킨다.  

- 갈수록 명절을 쇠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다. 아직은 친척집이 먼 지방에 있는 경우가 많아, 명절을 쇠면 바로 시골, 지방으로 내려가서 그곳의 삶의 경험을 짧게나마 하게 된다. 그런데 명절을 점점 덜 쇠면서 잠시나마의 체험도 어려워지고 있다. 

- 국내여행 문화가 쇠퇴하고 해외여행 수요가 늘었다. 물론 여행가서 느끼는 지역의 풍경과 실제로 살면서 느끼는 지역의 풍경은 정말 차이가 크다. 하지만 국내여행 쇠퇴로 수도권 거주자들은 여행가서 느끼는 류의 지방조차 경험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위 세 변화는 모두 '수도권 청년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라는 사회문제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위 세 변화를 만들어낸 요인들이 어떤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자. 

1. 생활수준의 고도화, 도시화. 

2. 구시대적으로 여겨지는 제사 문화 쇠퇴,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식 확산. 성차별적인 명절 문화에 대한 저항.

3. 생활수준의 향상, 여가 문화 발달

이런 좋은 것들을 어떤 바보가 반대하겠는가? 청년들이 지방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드는 댓가로 위의 것들을 포기하라고 하면 다들 정신 나갔냐고 욕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수도권 청년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를 해결하겠다고 이촌향도를 다시 유행시키거나, 명절 문화를 부활시키거나, 국내여행을 다시 증진시키는 건 기껏해야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하거나 더 나아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위에서 살펴봤듯, 사회문제들은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인 사회현상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회 문제가 복잡하고 해결이 어려운 건 이런 아이러니함에서 온 면도 크다. 우리는 사회문제를 논할 때 이를 인지하고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보다 건설적이며 사실에 부합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 놓을 수 있다.

  1. 다른 도시도 아니고 전주에 '영화관'은 있냐고 물어본다던가, 여수와 부산을 단순한 관광도시로 인식한다던가.. [본문으로]
  2. 강원도 출신에게 감자드립을, 제주도 출신에게 감귤과 돌하르방과 제주도 사투리 드립을 치는 식으로.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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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팬이나 광신도는 단순히 자신들의 우상을 광신적으로 지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도가 심한 경우, 광적으로 지지하는 이유가 된 자신들의 우상의 인품, 언행에 열광하는 걸 넘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광적인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그 정도가 되면 광신도들은 자신들의 우상 직접 말려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광신짓했던 인간을 배신자라면서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한다. 자기들이 열광했던 우상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적으로 돌변한다. 

그 모범적인(?) 사례가 바로 이슬람 역사 극초기에 등장한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최초의 이슬람 개종자 중 한 명인 알리는 원래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헌신을 이유로 자신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스만을 암살한 자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음으로써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알리의 등극은 파벌 간의 충돌을 야기했다. 맨 먼저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메카의 귀족 탈하와 주바이르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가 이끌던 파벌이었다. 알리는 656년의 낙타 전투에서 반대파를 물리쳤다. 그 다음에는 우스만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충성 요구를 거부하고 우스만을 위한 복수와 그 살인자 일당의 처형을 요구했다. 두 맞수와 그 군대는 시핀 전투(657)에서 격돌했다. 수개월에 걸친 일진일퇴와 협상 끝에 온건파의 주도로 양측은 우스만 암살의 정당성 여부의 문제를 조정하는데 합의했다. 그러자 하와리즈(이탈자들)라 불리는 알리의 지지세력 일부는 알리가 그런 조정에 합의한 것 자체가 그를 칼리프로 추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저버리는 동시에 종교적 원칙에 반하는 행위라고 여겨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들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유혈사태로 인해 알리에 대한 무슬림의 지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중략) 알리가 하와리즈파에 의해 암살된 뒤, 무야위야는 자칭 칼리프를 선언했고 주요 세력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가 바로 우마이야의 왕조(661~750)의 시조이다.     

-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신연성 역, 이산, 2008, p.111-112.

초대 이맘으로 시아파에서 추앙받는 알리는 자기 광신도에 의해 허무하게 살해되었다. 결국 알리의 정적이었던 무야위야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알리 광신도들의 초기의 바람과는 정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현대 이슬람계의 수니-시아파 갈등의 뿌리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광팬, 광신도들의 잠재력인 자폭능력은 어마무시하다. 단순히 광신도짓으로 자신들 우상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걸 넘어, 자신들 우상 자체를 직접적으로 해쳐버릴지 모른다. 위 사례처럼 파괴력이 반영구적으로 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미치도록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단순히 그들의 아첨에 빠져 맛이 간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넘어, 그들이 직접 당신을 해칠 수 있기에. 


+ 비슷한 사례로 흑인 분리운동을 추구했던 과거로부터 발을 뺐다가 배신당했다고 느낀 추종자에게 암살당한 맬컴 X, 홍위병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해먹었다가 통제불능의 존재가 되어 하방시켜야 했던 마오쩌둥이 있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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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이주화 이맘과의 인터뷰다. 

서구사회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이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극단화된다는 이야기가 많은지라, 한국의 무슬림들은 어떨지 평소에 궁금했었다. 그래서 한번 읽어봤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810100052&page=1

눈여겨볼 만한 부분만 인용해보자면, 


  ― 대학에서는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국립이슬람대학교에서 아랍어와 이슬람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 꼴통스런 와하비즘의 본산지고, 해외에 지하디스트를 수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사우디에서 수학했다고? 이거 좀 걱정되긴 하는데...  사우디가 이슬람의 발원지이자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극단적인 종교인들이 한국에 들어올수도 있겠다 싶다. 


  ― 이슬람 샤리아법과 국가의 실정법(實定法) 가운데는 어떤 것이 우선합니까.
  
  이주화 이맘은 “이건 정말 오해 없게 잘 써주셔야 하는데…”라면서 곤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무슬림 개개인은 샤리아법을 우선적으로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이는 ‘도덕법’으로서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주화 이맘은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샤리아법정이 인정되고 있고, 샤리아법이 실정법에 우선한다”면서 “우리는 그런 걸 바랄 수는 없고, 국가의 실정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무슬림은 샤리아법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샤리아법정이 인정되고, 그럴 정도로 이슬람 세력이 강해진 영국을 부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 일단은 실정법을 존중한다니 다행이긴 한데, 말의 뉘앙스를 보니 장기적으로 샤리아가 도입되길 바라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살짝 든다. 삐딱하게 생각하자면, 지금 샤리아를 요구했다간 사회에서 매장당할 기세라 입 닫는 거고, 무슬림들의 수가 많아져 세력이 형성되면 그때 요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다. 

그나저나 영국에선 샤리아법정이 따로 존재하는구나. 저 정도면 이슬람 이민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을 듯. 


― 무함마드 만평사건, 샤를리 에브도 사건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종교와 자유의 문제, 그런 것인 것 같은데…. 자유가 사회악(社會惡)을 초래한다면, 그런 자유가 마냥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 표현의 자유가 선을 넘어선다면 비판은 피할 수 없지만, 표현 내용을 비판하는 것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물론 종교인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적인 내용이 불쾌할 수 있겠고, 신성모독적인 언행을 하는 건 개인적으로 어리석고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그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자고 하면 반대다. 저 표현만으론 의견을 단정하기 힘드니 넘어가겠지만. 

그리고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사람들이 열몇명씩 죽어간 대형참사다. 신성모독을 이유로 피해자를 죽인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며, 신성모독적인 표현을 한 것보다 훨씬 큰 문제다. 그 부분은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아쉽다.  


 ― IS(이슬람국가)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슬림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모두 정당성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해도 그런 만행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등에서 벌어지는 테러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고유한 목적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코란》에도 ‘만일 누군가 지상에서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 (선량한)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살해한 것과 같은 것이며,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구한다면 그것은 인류 전체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제5장 32절)’ ‘정당한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살인을 하지 말라(제17장 33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구나. 다행. 


 원래 이주화 이맘과의 인터뷰를 기획했을 때에는 이슬람과 관련된 여러 현안에 대해 치열한 토론이 있는 인터뷰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주화 이맘은 ‘교과서적 답변’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슬람 원리주의 내지 극단주의와 관련된 질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터키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다행히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당선되어서…”라고 한 것이나, 그의 책 《이슬람과 꾸란》에 나오는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에 대해 “미군과 연합군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도발 행위는… 재래식 무기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적할 수 없는 엄청난 횡포와 테러 행위에도 불구하고…”라는 대목에서, 무슬림으로서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 엿볼 수 있었다. 

=> 이슬람 사회들은 전반적으로 반미/반서방 성향이 강한데, 그 성향이 그대로 보이는 듯? 반미/반서방 성향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약간 진영논리처럼 느껴지긴 하다. 이라크 침공이야 명백한 미국의 실수였으니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반미 원리주의 탈레반에 신음하던 아프간 침공까지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도발 행위로 비판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 그리고 이슬람주의 성향에다 독재를 강화하는 에르도안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좀. 옛날에 반미 유행했을 때 흔히 보이던 레파토리라 이 사람만 탓할 순 없긴 한데...  


만약 이 사람이 종교인으로서 한국인 무슬림을 대변한다면, 한국의 무슬림들은 지금은 큰 문제 없지만 잘못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표현의 자유, 종교 율법 도입 문제에선 확실히 사회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슬림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무시못할 사고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게 저 이맘 잘못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슬람 사회와 무슬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소하게 다가오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관의 차이는 확실히 있으며, 자칫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무슬림들이 비무슬림과 함께 한국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첫 거름이 될 것이다.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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