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시각으로 2018년 10월 7일, 브라질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이루 보이소나루(Jair Bolsonaro)가 46%를 득표해, 29%를 득표한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브라질은 결선투표제를 실시하는 국가이며 어느 후보도 과반득표를 하지 못했기에 위 둘이 10월 28일에 결선에서 맞붙을 것이다. 


이것만 보면 평범한 선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브라질인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이다.

왜나하면 현재 1위 선두주자이며 결선투표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보우소나루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브라질의 17년간 군 생활을 하다 퇴역한 국회의원이다. 현재 우파 내지 극우 성향의 사회자유당(PSL) 소속으로, 브라질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활동을 하며, 스스로를 반부패 반기득권의 화신으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그는 강력범죄 퇴치, 국영 기업들의 민영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 보고 그를 좋은 보수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극우 포퓰리스트고, 막말로 악명 높은 정치인이다. 


뭐 막말로 유명한 정치인이야 많다. 안그래도 많았는데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정권이 유행하면서 유행병처럼 생겨나고 있다. 트럼프야 이 분야의 전설이 되었고, 


하지만 그의 망언 수위는 도를 넘었다. 이게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을 정도다. 그에 비견될 수준의 막말 정치인은 전세계를 뒤져봐도 두테르테 정도밖엔 나오질 않는다.




(군부 독재에 대한 망언[각주:1])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의 잘못은 이들이 (정적을) 고문했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야 했다"


 

(여성에 대한 망언) 

"여성은 임신을 하기 때문에 남성보다 임금이 적어야 한다"


"나는 아들을 넷 연속으로 낳았다가, 신체적으로 약해진 순간 딸을 낳고 말았다"


"나는 너를 강간하지 않겠다. 왜나하면 당신은 강간당할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각주:2]



(타 인종에 대한 망언)


"우리 아들은 교육을 잘 받았기에 흑인 여자랑 놀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난민들은 인간 쓰레기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망언[각주:3])


"나는 내 아들이 게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랄 것이다"


"만일 두 남자가 공공장소에서 뽀뽀한다면 둘을 때릴 것이다" 




이것만 보면 단순 막말 제조기로, 기피 1순위로 올라야 마땅한 후보다. 

실제로 대선 며칠 전에 브라질에서 여성들이 단체로 반-보우소나루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우소나루가 인기있는 걸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대선 2위이자 보우소나루 대항마인 페르난두 아다지가 인기없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질을 망쳐놓고, 국민들을 실망시킨 노동자당(PT)의 후보이다. 



한때 노동자당이 브라질에서 인기를 구가한 시절이 있었다. 그 유명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시우바가 노동자당 출신이다. 그는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브라질을 부흥시켰고, 한때 지지율 80%를 기록하는 위엄을 보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 빈곤율이 낮아지고 경제가 발전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 인기는 룰라 후임까지 이어져, 같은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가 후임으로 당선되었다. 그것도 연임으로. 


그러나 페트로브라스 사건이라는 대규모 비리 게이트로 호세프는 신망을 잃었고, 거기에 경제위기가 찾아온 데다 회계부정 등 물의를 일으키자 그녀는 탄핵되었다. 탄핵으로 인한 후임 미셰우 테메르는 지지율 3%라는 기록을 세우는 등 인기없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룰라도 비리 혐의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현재 항소로 인해 재판 중이나 대법원 결정으로 대통령 재출마가 금지되었다. 페르난두 아다지는 그제서야 출마하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부패한 기득권 이미지를 뒤집어썼고, 

룰라와 노동자당 후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후보라 비호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보우소나루가 반부패, 반기득권 세력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이런 이미지는 치명적이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별로 절대 안 뽑겠다고 응답한 비율이다. 

막말 문제 없는 아다지가 막말 제조기 보우소나루보다 조금 안티가 적은 수준이니,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브라질은 현재





경제위기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2% 이하의 저성장에 시달리고 있으며,




실업률은 12%나 되어 매우 높아진 상태고,





살인율은 안그래도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데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거기에 부정부패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수사받고 재판받으며, 국민들의 환멸을 받고있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 어떻게 반부패, 반기득권,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보우소나루 지지자를 탓할 수 있겠는가.



브라질 대선은 뭔가 열화판 트럼프 vs 힐러리 대결을 보는 듯 하다. 

트럼프보다 더 막말 심한 보우소나루 vs 힐러리보다 더 부패해 보이는 아다지.

개인적으로도 미국인이라면 트럼프 vs 힐러리에서 과감하게 힐러리를 지지했겠지만, 브라질인이라면 아다지를 응원하질 못하겠다. 현재의 브라질은 그때의 미국보다 훨씬 사정이 안 좋으며, 아다지 후보는 힐러리 후보보다 이미지나 능력이 확실히 딸린다.



누가 당선되어도 브라질의 미래는 험난할 것이다. 마음이 편치 않다. 


  1. 참고로, 브라질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1년간 군부독재 시절을 겪었으며, 보우소나루는 군부 출신으로서 이 시기를 미화하며 추억화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한 여성 국회의원이 그와 논쟁하다 그를 상대로 '강간범'이라고 외치자 보우소나루가 외친 말. [본문으로]
  3. 참고로 브라질은 2013년부터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이다. 이런 국가에서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내뱉는다는 게 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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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세계적인 불평등 석학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가 실제로 한 주장이다. 


 21세기에는 세금과 사회적 이전이 끼어들기 이전에 개입하는 전략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러한 전략에는 자산과 교육 등 기초자본 불평등의 감소가 포함된다. 기초자본(개인의 부와 숙련기술)의 불평등이 완화된다면 재산 규모에 따른 부의 수익률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가정할 때 (세금과 사회적 이전을 차감하기 전의 소득인) 시장소득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다. 시장소득 불평등을 통제하고 장기간에 걸쳐 억제할 수 있다면 사회적 이전과 세금을 통해 정부가 하는 재분배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재분배를 덜 강조해도 괜찮다면 가처분소득 불평등의 감소야말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또는 그것이 기회 평등을 촉진하고 경제 성장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높은 세율이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이들도 만족할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대물림된 유산의 가장 유해한 측면을 제거할 수도 있다. 


 낮은 시장소득 불평등과 비교적 작은 정부를 결합한 경제 모형은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몇몇 아시아 국가에 존재하는 모형이다. <도표 5-1>은 특정한 서구권 국가와 한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고소득국가 세 곳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세금과 사회적 이전을 공제한)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는 세로축에, 시장소득의 지니계수는 가로축에 표시되어 있다. 한국, 대만, 일본의 가처분소득 불평등 수준은 서구 고소득국가와 거의 같다. 그러나 시장소득 불평등은 훨씬 더 낮아서 지니계수로 0.15나 차이난다. 결과적으로 주어진 가처분소득 불평등 수준에 맞추다보면 아시아의 정부 재분배가 크게 줄어들고 정부 기능 역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타이완과 캐나다를 비교해보자. 두 나라 모두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가 0.33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타이완은 재분배에 전혀 관여하지 않다시피 한다. 다시 말해 타이완의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에 대한 지니계수는 거의 같다. 또한 사회적 이전은 시장소득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에 캐나다는 세금과 사회적 이전 시스템의 규모가 커서 상대적인 수치로 따질 때 타이완의 3배나 된다. 그 결과 시장소득의 불평등 수준은 0.47,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은 0.33으로 낮아졌다. 


-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서정아 역, 2017, 21세기북스, p.294-295.




인용문에 언급된 <도표 5-1>



표현이 딱딱하니 요약하자면, 

조세와 복지지원 등 재분배 기능을 통한 빈부격차 감소보다는 조세나 복지지원 이전의 순수한 시장소득, 세전 상태에서의 빈부격차를 감소시키는 게 좋다. 두 방법 모두 빈부격차를 줄이는 건 똑같고, 고부담 고복지가 가져올 비효율성을 우려하는 보수우파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대만 일본 등 동북아 선진국들이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물론 이걸 보고 동북아시아 찬양을 외치기 전에, 연구되어야 할 지점들이 있다. 사실 저 책에서 저자는 저 부분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가, 저 이야기가 가설 수준이며 차후 연구가 필요함을 암시했다. 


일단 개인적으로 든 의문만 따져도,

1. 동북아 선진국들의 시장소득/가처분소득(쉽게 이야기해서 세전/세후) 지니계수는 제대로 측정된 게 맞는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은 현 지니계수 수치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2. 1의 대답이 Yes라면, 어떻게 동북아에서 시장소득(세전) 격차가 낮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각주:1]

3. 2의 대답이 Yes라면, 동북아의 이 모델은 앞으로도 지속가능한가?

4. 3의 대답이 Yes라면, 서구사회는 동북아 모델을 본받을 수 있는가? 



가설 수준의 이야기여도 한국인으로서 동북아시아 모델이 찬양받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서구사회가 동북아시아의 역사, 사회, 문화를 존중하자는 다문화주의적 주장이야 많이 봤지만, 그건 단순한 다름의 문제였는데 이건 단순 다름을 넘어 동북아시아의 불평등 관련 결과물이 서구 선진국보다 우수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활발하길 기원한다. 

  1.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기초자본의 하나인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 근면함을 중시하며 범죄 등 반사회적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이게 심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테니. 툭하면 교도소와 저임금 일자리와 실업을 왔다갔다하는 미국 슬럼 주민들을 생각해보자), 다들 가난한 상태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산 불평등이 초기에 매우 낮았다는 사실 등이 있어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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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 일반화는 항상 집단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며, 이로 인한 차별도 아무렇지도 않게 정당화한다.


중수: 일반화는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차별을 조장하므로 무의미하다고 일축하며, 인간 개개인을 보라고 외친다.


고수: 일반화가 때때로 집단을 이해하는 데 유용함을 인정하되, 무조건적인 일반화나 일반화로 인한 차별은 경계한다. 



인간은 살면서 여러 범주의 인간들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되므로, 교류하는 집단을 지혜롭게 일반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은 물론 사회 단위에서도 이런 능력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인간사의 비극은 인간들은 하수가 절대 다수이며, 중수는 소수고 고수는 더더욱 적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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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들은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을 규탄하며, 폭력과 억압의 가해자나 동조자에게 죽창을 꽂으려 한다.

그러나 신좌파들이 정작 죽창 꽂게되는 부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빈곤층이 부유층 가정보다 가정폭력에 취약하다. 신좌파들의 적인 트럼프와 브렉시트의 지지자는 저학력자에게 많다. 영국은 파키스탄보다 여성 위상과 성소수자 인권이 월등히 좋다.

따라서 신좌파들이 죽창질을 하면 그 죽창은 권력자보다는 그들이 보호해야 할 빈곤층,  약자에게 가는 경우가 많다. 약자들은 의외로 신좌파의 편이 아니다.

이 역설을 눈치챘는지 신좌파들은 무슬림, 여성 같은 몇몇 사회적 약자집단의 폭력과 억압에는 거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농촌 거주자, 빈곤 계층 등 다른 사회적 약자집단에는 계속 죽창을 날려댔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극과 극이다. 거기에 두 방식을 한번에 하면서 비일관성이라는 추가적인 문제까지 생겨났다. 이 문제는 현재 서구 선진국에서 보수우파가 진보좌파 까는 18번 레파토리가 되었다.

이런 난제에서 벗어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죽창질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러나 신좌파들이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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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사회를 꽃밭처럼 묘사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청년들에게 평생을 좌우할 공간의 한 면만 가르치는 것은 기만이며, 무책임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안 가르쳐도 사회생활이나 언론을 통해 다들 어두운 면을 인지하게 된다. 옛날처럼 정보가 통제된 사회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어른들(기득권)이 우리를 속였다"는 배신감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이는 극단적인 운동과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다.

학생들에게 세상의 어두운 면을 숨기고 싶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백하듯 말해야 정의로우며 청년에게 제일 바람직하다.

사회문제를 인식함으로서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길러내고, 

시민으로서의 책임감과 자세를 배우고, 

더 나아가 사회문제에 개인적으로 맞닥드렸을 때 적극적인 대처 능력을 길러낸다. 

이런 교육은 정의로우며, 청년들에게도 최선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시민의식을 함양하고 사회를 개선하려는 건설적인 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회를 꽃밭처럼 가르치는 교육만큼이나 문제적이다. 

다름아닌 미국의 최근 교육이 그렇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정치 관련 분야에서, 많은 교수들이 학생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분야의 교수들은 미국 정치제도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 우선 학생들이 정치제도에서 많은 부정의와 위선을 찾도록 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런 반사 작용에는 각 학문 분야마다 다른 형태를 띤다. 많은 영문학과에서는 고전 작품에서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를 들춰냄으로써 계몽의 가치를 해체한다. 역사학과에서는 정치 발전의 담론이 거짓임을 밝히고, 자유민주주의가 엄청난 부정의를 양산했음을 증명한다. 사회학과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빈곤 문제와 미국의 약점에 주목하며, 미국에 남아있는 차별적인 양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학과별로 보여주는 이러한 접근은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결합된 효과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정치제도를 무시하는 것이 지적 교양의 증표라고 느끼게 한다. 영어를 전공한 발고 호기심 많은, 어느 여학생이 이런 부분에 있어 나에게 매우 혼란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가 계몽주의의 창조물이고, 민주주의는 계몽주의의 가치가 널리 받아들여졌을 때 작동한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주의가 매우 잔인했었고, 계몽주의의 가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이것은 계몽주의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함을 뜻하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에 대한 무의식적인 헌신을 버려야 함을 뜻하는가? 

 나는 그녀가 발견한 갈등들이 실재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민주주의와 계몽주의 모두를 믿거나 또는 믿지 말하야 한다는 의견도 절대적으로 옳다. 물론,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어낸 지적 전통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녀가 결국 깨닫기를 바랐다.

(중략)

 결과적으로 많은 곳에서, 시민이 반(反)시민이 되어 버렸다. 현대 사회의 특징인 만연한 부정의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에 젖어들고, 계몽주의의 '문제적인' 가치들을 해체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교사와 교장들은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자랑스런 수호자가 되도록 북돋는 시민 교육을 하기가 어렵다.


- 『위험한 민주주의 -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야스차 뭉크 지음,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18. p.317-319.


위에서 보듯, 무분별한 사회비판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주입시켜 학생들이 버려서는 안 될 가치나 사상을 버리게 만들고, 가져서는 안 될 가치나 사상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 인용한 글에 나오는 예시를 들자면, 청년들이 자유민주주의와 관용을 포기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하거나 적이라 인식되는 소수자 집단에 대한 권리 탄압을 원하게 만들 수 있다.[각주:1]

 

이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청년들에 이제 익숙해진 헬조선론이나 레디컬 페미니즘은 위 잘못된 선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사회에 대한 무분별하고 근거 부족한 분노와 혐오를 충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론이나 레디컬 페미니즘이 거론한 사회문제들엔 실제로 심각한 문제인 것도 몇 있다. 그러나 그런 주제에서도 이들은 민주시민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시민 청년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1. 청년들이 기성세대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회의를 가지고 극단주의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것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위와 같은 그릇된 교육도 일조했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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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한국은 일본보다는 대만이랑 비교돼야 맞다.

정치구조, 역사, 경제구조, 사회문화 등을 감안하면 한국은 일본보단 대만과 구조적으로 더 유사하다. 


일단 내가 아는 것만 말하자면... 


- 두 국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각주:1], 일본에 비해 국가 체급이 작다. 한국의 영토는 일본의 25%, 인구는 40% 수준. 대만의 영토는 일본의 10%, 인구는 20%. 


- 두 국가 모두 피식민국가였다. 심지어 식민지배의 주체도 일본 제국으로 동일하다. 


- 두 국가 모두 분단국가이다. 각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 맞서고 있으며, 이 맞서는 과정에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국가적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 두 국가 모두 가난한 독재국가에서 민주적인 경제 선진국으로 크게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피식민국 중 이 정도의 눈부신 성과를 거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대만이 유이(唯二)하다.


- 두 국가의 생활수준이 매우 비슷하다. 1인당 GDP(PPP)로 따지면 대만이 한국보다 확실히 높으나, 이는 대만의 세후소득 등을 감안할 때 GDP(PPP)의 한계로 해석하는 게 맞아 보인다. 1인당 명목GDP나 HDI[각주:2]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이 대만보다 조금 높지만, 세계 200개 국가 중에선 정말 비슷한 편이다.


- 두 국가 모두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민간영역에 상시적으로 간섭하고 민간을 규율하는 국가자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는 한국과 대만의 경제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영향을 끼쳤다. 


- 둘 모두 동북아시아적 집단주의, 유교문화를 공유하여, 가치관이나 국민성이 매우 유사하다. 일본도 동북아시아적 문화를 공유하나, 지리적/역사적 이유로 동북아 국가 중에서는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가 발달했다. 실제로 Hofstade의 연구에서는 한국인과 제일 비슷한 국민성을 가진 국가가 대만인이라 한다.[각주:3] 전세계 국가별 국민들의 가치관, 세계관을 조사하는 학술적 프로젝트 World Value Survey에서도 한국과 대만은 매우 비슷하게 나타난다.[각주:4]


- 한국과 대만 모두 식민지배의 연륜(?)이 없고, 성장이 늦다보니 학술이나 사회자본 수준이 타 선진국에 비해 낮다. 보통 학술과 사회자본 수준이 높아야 제국이 될 수 있고, 식민 지배를 통한 경험으로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많이 올라왔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편을 듣는다. 저신뢰 사회인 것도 한국과 대만이 비슷하며, 부정부패도 둘 다 선진국 중에서는 심각한 편에 속한다. [각주:5] 


[2018.09.14 추가] - 그래서 학계의 미국 의존성이 심각하다. 한국은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 대학원생이 많은 편인데, 대만도 인구비례로 보면 비슷하다.  


- 인구구조가 한국과 대만이 매우 유사하다. 현재의 출산율이나 노인인구 비중, 중위연령도 비슷하고, 미래 추계로도 인구 정점, 미래의 노인 인구 비중 등이 상당히 흡사하게 나타난다. 인구구조의 면에서 일본이 한국의 미래라면 대만은 한국의 거울이다. 


- 분단이라는 안보적 상황으로 오랫동안 징병제가 유지되어왔다. 한국이야 다들 아는 대로고, 대만은 2018년에 완전 폐지했지만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집단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 교육을 통해 군 입대가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군대가 개인의 삶,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컸다. 복무기간도 긴 데다 병역을 회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두 국가 모두 타 징병제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복무요원[각주:6], 산업기능요원같은 다양한 형태의 대체복무가 존재했다. 심지어 병영부조리나 가혹행위, 군 의문사 등 군대문화의 병폐가 심각했다는 것도 비슷하다고 한다. 


[2018.09.14 추가] 

- 국가원수 두 명이 재판을 받거나 수감 중이다. 민주화 이후만 보면 한국은 이명박, 박근혜가 대만은 천슈이벤과 마잉주가 수감 중이거나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두 명 모두 2018년 9월 14일 기준으로 전임과 전전임이라는 것까지 똑같다!!


[2018.09.14 추가] 

- 구직난이 심각하며, 두 나라의 실업률과 청년실업률이 각각 4%, 10-12% 남짓이라는 점이 비슷하다.[각주:7] 구인난을 겪고 있는 다른 동북아시아 선진국 일본과는 대조된다. 


[2018.09.14 추가]

- 두 국가 모두 번체자를 쓴다. (비밀댓글 제보)


등등...


대만은 정말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나라다.


그래서 대만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등을 공부하려 하는데 자료 찾기가 쉽지 않다. 


대만은 국제적 분쟁지역이고 하필 세계 강대국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대고 있다보니, 왠만해선 양안관계의 틀 속에서 접근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한반도라는 세계적인 분쟁지역에 있지만, 한반도 분쟁과 관련없는 한국 자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한 것과 대조된다.

또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로 인해 국제적으로 국가 취급도 못 받다보니, 각종 국제적인 통계나 지표에서 자료가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일단 다음 달에 대만으로 여행가는데, 대만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서 시작해도 될까나. 대만에서 사는 것과 대만을 여행하는 건 전혀 다르다는 건 유념해야겠지만. 

  1. 중국이라고 쓰면 대만의 정식명칭 중화민국과 구분하기 어려워서, 원래 정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쓴다. [본문으로]
  2. Human Development Index. 1인당 GDP, 평균 수명, 평균 교육기간을 지표화해 측정하는, 개인의 후생수준을 나타내는 공신력 있는 지표이다. [본문으로]
  3. https://blog.naver.com/hong8706/40202778574 참고. [본문으로]
  4. http://www.worldvaluessurvey.org/images/Culture_Map_2017_conclusive.png 참고. 가로축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좌측) 대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우측)이다.세로축은 전통-종교적 가치관(하측) 대 세속-근대적 가치관 (상측) 가리킨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한국과 대만은 서로 딱 붙어 있는 수준이다. 두 국가 모두 세속-근대적이며,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이 강하게 나타난다. [본문으로]
  5. 엄밀히 말하면 대만의 신뢰/청렴도수준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좀 더 높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한국인들이 당연시하지만, 국제적으로는 ILO 협약 29조에서 말하는 강제노동에 해당된다. 개인에 군사 업무와 무관한 분야에 의무를 부여하는 행위는 강제노동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최근까지 유지해온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대만(올해부터 폐지)가 유이하다. 이런 면에서 한국과 대만 징병제의 독특함(?)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한국은 http://hankookilbo.com/v/ce8756fc79a44fdba82290683ec9e3cd 참고. 대만은 http://shindonga.donga.com/3/home/13/1357496/1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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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은 존 롤스와 그의 『만민법Law of People(1999)』에 따라 글로벌 기회 평등이 중요한 사안이 아니며 글로벌 기회 평등을 옹호하는 주장은 한결같이 국민 자결의 원칙과 충돌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국가 간 부와 기회의 격차를 각국이 각자 다른 선택을 함에 따라 만들어진 산물로 간주한다. 

(중략)

롤스나 다른 국가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은 자신보다 부유한 사람의 소득이나 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요구는 정의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이 재분배를 통해서든 부유한 사회로 이동할 권리를 통해서든 부유한 사회 구성원의 소득을 요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반드시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한다. 그 결과 일부 국민이 집단적으로 무책임한 선택을 해버린 다음에 건실한 삶을 영위하거다 더 나은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분배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국민 자결(어떤 나라의 시민권자 집단이 내린 결정)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 롤스를 비롯한 국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지는가』, 21세기북스, 2017, p.191


몇 달 전, 이 책을 읽다 충격받은 기억이 난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약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옹호한 존 롤스.

하지만 그의 동정심은 국가 내 개인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국가 전체가 빈곤한 약소국에는 보수 꼰대나 할 발상을 했다.


만약에 그가 약자에 대한 지원에 도덕적 해이나 개인의 책임성 문제를 언급하며 반대했다면, 그는 냉혹한 보수꼰대라는 혹평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빈곤국에 대한 지원에 도덕적 해이나 국민자결을 운운하면서 반대했을 땐 그 누구도 그를 보수꼰대라고 하지 않았다.

뒷부분에 저자는 롤스의 이런 면모를 이중잣대다, 정의론과 상반된 소리를 한다, 국가와 개인이 그렇게 다르냐면서 비판한다. 나도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국가와 개인 행동의 본질은 그렇게 다른가. 

국가와 개인의 불평등이 상반되는 분석과 처방을 해야할 정도로 다른 성격인가. 


처음에는 롤스가 사회자유주의자, 진보 정치철학자일 줄로만 알았는데 실망이 참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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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특히나 정치 각성에 즉각 반응할 수 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이들을 자국의 정치 현실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에 이들 역시 무장 투쟁에 가장 이끌리기 쉬운 정치 집단이다. 따라서 현재 많은 지역의 수많은 대학생들은 과거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에 해당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는 산업시대 초기 무산 근로자로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이념 투쟁과 혁명에 동원되기 쉬운 집단이었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치 선동은 손쉽게 그들의 미숙한 감정을 단순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한 행동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런 행동이 특정 대상에 대한 분노와 감정에 바탕을 둘수록, 이들은 정치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당연히 민주주의와 법치, 종교적 관용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흑백 논리가 이들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인종, 민족, 종교가 모욕을 받았다고 느끼면 거기에 반응하고, 이런 주관적인 느낌이 이들이 가진 흑백 논리의 뿌리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이 그랬다. 흑백 논리는 젊은이들의 감정에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보복 행위도 정당화시킨다.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략적 비전』, p.43-44, 아산정책연구원, 2016


원래는 제3세계 청년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구절인데, 현대 선진국들의 청년들에 적용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인터넷을 바탕으로 한 가짜 뉴스의 유행, 포퓰리스트들의 정치적 선동과 득세, 인터넷 사이트에서 폭발하는 분노와 혐오, 한 편에서는 이민자 배척, 다른 편에서는 무조건적인 PC와 페미니즘으로 하는 비자유주의적인 사회움직임, 양극화된 정치구도. 


물론 청년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분노하는 게 당연히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청년들의 분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청년들의 운동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꿀 것이라면서 낙관하면 안 된다.


빨간 밑줄 쳐진 부분처럼, 청년들의 분노가 비자유주의적이고, 타인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검은 밑줄로 쳐진 매스미디어의 성격 때문에 더 심해진다.


얼굴도 모르는 남성에게 비하적인 표현을 쓰는 워마드 회원. 

무개념 여자들을 다 죽여버려야 한다는 여성혐오자.

문재인을 비판하는 언론들을 적폐로 몰아가는 문빠.

직접적 원한도 없는 타 인종에 폭력을 행사하는 인종주의자(racist).

축구선수가 경기에서 졸전했다고 사형시키라는 국민청원을 올리는 한국 네티즌. 

이슬람교만이 답이며 무신론자들을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무슬림.


이것은 한국에서, 타 선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방식이다.

사회 비판의 형식을 띤 분노가 무조건적인 파괴의 에너지로 전이되고 있다. 

파괴의 에너지는 개선을 제일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더 위험하다.


분노의 힘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치자.

그래도 분노는 잘 축적하고 저장했다가 사용할 시점과 장소를 잘 맞춰서 배출시켜야 한다. 

그래야 분노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고, 분노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다들 분노를 건전하게 키울 참을성이 없어져서 그런지,

분노를 사회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좌파들마저 분노 처리에 서툴러 보인다. 

무고한 사람이나 집단을 공격하려 하거나, 분노 조절을 못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분노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예상을 못하는 사람이 많아, 위 현상은 더욱 강화된다.

분노가 사회문제의 중심을 향할 거라 막연히 기대하기도 한다.

좌파들 절대다수는 아랍의 봄이 시위라는 형식을 통해 아랍 지역을 자유민주주의적으로 만들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중동의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나타난 세력은 여성과 성소수자, 무신론자를 억압하려는 이슬람주의자들이었다. 이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무조건적인 분노를 방관하거나 방조하는 태도는 

결국 사회 전체를 초토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이다.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세상을 과연 누가 원할까. 

이 사실은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분노에 미쳐 모든 걸 파괴하려는 자에도 적용된다. 


더 파괴할 게 없게 되면 욕구불만에 빠지거나 허무해지기 십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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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서구 선진국에는 이런 좋은 문화와 시스템이 있다. 그러니 한국도 따라하자!"는 레토릭이 잘 통했다. 한국 사회는 서구 선진국에 대한 갈망이 컸기에 이게 왜 좋은지는 잘 설명하지 않고, 그냥 "서구가 이렇다니 옳은 거다!"고만 해도 많이들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게 앞으로는 무조건 통하지는 않을 거다. 

이게 왜 좋은지 대중에게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더더욱.


서구 선진국들은 한국보다 생활수준이 높고, 동성결혼 합법화라던가 개인주의 등 진보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구 선진국은 한국인들의 로망이 되었고, 이 로망은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물론 서구 선진국들도 과도한 복지비용, 불평등의 확대,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갈등처럼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사회문제들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전이었다. 그리고 정보통신이 덜 발달했던 시기였기에, 이런 문제가 한국 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관련자들이 의도적으로 관련 정보를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서구사회에서 2008 세계 금융위기, 남유럽 금융위기,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등 포퓰리즘 유행, 유럽 난민 사태, IS의 연속 테러 등등 많은 사건들이 터졌다.

서구사회의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워낙 큼지막한 사건들이기에 엘리트들이 더 무시할 수 없다. 

과거와 달리 인터넷과 SNS 사용이 더 자유로워졌기에, 이를 숨길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는 서구의 진보적으로 여겨지는 정책이나 가치들을 예전처럼 마냥 좋게 볼 수 없다. 


짧은 노동시간은 임금 감소 및 투잡의 활성화, (일찍 문 닫는 가게들 속에서의) 불편한 일상생활이라는 댓가를 치른다. (이 현상은 노동시간 단축하는 한국에서도 일부나마 나타난다)

서구식 복지국가는 많은 비용을 초래하며, 저출산 고령화 속에서 지속되기 어렵다.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좌-극우를 유행시키는 문제를 불러왔다.

이민과 난민 유입(특히 무슬림)은 경제 및 사회문화적 갈등을 필연적으로 일으킨다.


거기에 한국은 최근 부패 정치인 박근혜를 평화적으로 탄핵시켰다. 이런 평화적인 운동은 포퓰리즘이 유행하는 서구사회에 희망이 되기까지 했다.

어떤 면에선 한국이 서구 선진국보다도 잘 한 것이다. 그러니 서구가 무조건 한국보다 낫다는 말은 더 통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 사회는 과도한 위계질서나 성소수자에 대한 시선과 같은 문화적 결함들이 있기에, 서구적인 문화나 가치를 더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한국인들의 서구적인 문화나 가치에 대한 갈망은 아직 죽지 않았다. 낙태나 동성결혼, 개인주의, 복지국가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인은 점점 서구인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처럼 무조건적인 서구의 것 찬양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서구 선진국의 제도, 가치관, 문화를 도입하자고 한다면, 서구의 것이니 그냥 받아들이자고 하면 안된다. 

왜 이것이 한국에 필요한지, 한국에도 잘 적용될 수 있을지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안 그러면 "서구에서도 실패한 걸 왜 갖고 들어오냐?"는 핀잔만 받을 테니까. 


그리고 오만하게 국민을 계도하려는 태도는 버리고, 더 안다고 생각하면 친절하고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니가 뭔데 아는 척이야"하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분노를 맛볼 것이다.



+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나 난민 및 이민자 수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인들이 이 개념들에 대해서 특히 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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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그러나 나는 사회심리학자이기도 한 만큼, 그런 급격한 변화[각주:1]에는 격렬한 정치 분열이 뒤따르기 마련임을 잘 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의미 있는 발전인가, 아니면 한 나라가 영혼을 잃어가는 과정일까. 새로운 성 역할은 과연 오래도록 미뤄진 여성해방을 이루는 길일까, 아니면 가정의 기반을 약화시킬 요인일까. 이는 아주 중대한 물음들로, 민주사회라면 반드시 논쟁을 통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하략)


- 조너선 하이츠, '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中 한국어판 서문, 왕수민 역, 2014, p.9


갑자기 2년 전 읽은 책의 글귀가 생각나서 올려본다.


처음에 이 문구를 읽었을때는 순간  "성평등이 국가의 영혼을 잃게 하고, 가정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건 늙은 꼰대들이나 할 발상 아님? ㅋㅋ 이게 논쟁거리가 될 사안인가?" 싶었다.


지금 워마드 메갈리아 등에서 활동하는 넷페미, 제도권 페미니스트들의 행패를 보자 하면, 남녀평등이나 페미니즘의 공과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위 책에서 언급한 성평등에 대한 반대, 우려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100% 동의는 못 해도 공론장에 들어올 자격은 있다.  

자칫하다간 남녀평등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사회가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비속어와 혐오발언.

끈임없이 분출되는 페미니스트들의 분노와 불안함. 그리고 반사회성.

사회적 수용가능성 따윈 무시한 페미들의 트집잡기, 떼쓰기, 공격성.

무조건적이고 무책임한 비혼 비출산 장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유행한 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발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의 움직임은 광기 그 자체다. 이걸 통제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싫어진다.



스스로를 보수적인 면이 강하다고 생각해온 그런 나조차도, 진보와 사회개혁의 열망 속에서 순진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구나.

  1. 이 글에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발전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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